"우리 지식인들은 지금 직무유기 중"

[인터뷰] 동국대 강정구 교수 "성역허물기 계속"

등록 2001.11.12 01:05수정 2001.11.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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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북한에서 열렸던 8.15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 대한 우리 언론의 보도행태를 전국언론노조는 ‘광기어린 태풍’에 비유했다. 일부 방북인사의 ‘돌출행동’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도함으로써 오히려 본질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또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박종수 교수는 <신문과 방송>에 기고한 글을 통해 ‘말꼬리잡기식 여론몰이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꼬집었다.

이런 ‘돌출행동에 대한 부풀리기 보도’나 ‘말꼬리잡기식 여론몰이’의 중심에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만경대에서 ‘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있었다.

그는 8월 21일 김포공항에서 입국과 동시에 긴급체포돼 약 50일간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던 중 10월 11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로부터 한달여만인 지난 11월 9일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열린 초청강의를 위해 마산을 찾았다.

사건 당시 일부 우익단체들로부터 ‘빨갱이 교수’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받았던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며, 방명록에 남긴 글의 진의는 과연 무엇인지를 그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가톨릭여성회관의 강의를 3시간 정도 앞둔 9일 오후 5시10분께 경남도민일보 양덕동 사옥에 나타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밝고 활달한 표정이었다(기자는 그가 방북하기 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우선 건강부터 물어봤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요즘은 구치소 밥도 상당히 좋더군요. 내가 군대생활할 때보다 나은 것 같아요. 최근 2~3년 사이에 그렇게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볼 수 있고…."

- 석방 후엔 어떻게 지내십니까?
"구치소에 있는 사이 내 강의가 모두 시간강사로 대체됐기 때문에 대학에서 강의는 없지만, 학자가 공부하는 것밖에 할 일이 있나요. 그런데 리듬이 깨져서인지 효과가 잘 안나요."

- 구속된 건 이번이 처음이시죠?
"처음이죠. 대학 1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적이 있는데, 그때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잠시 있었던 적이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도 남대문에 있었으니 그곳하고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웃음)


- 이번 방명록 파문으로 학교에선 어떤 불이익이 없나요?
"아직까진 없는데…. 음 앞으로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직위해제를 당한다 할까, 뭐 그런 불이익도 있을 수 있고, 그걸 떠나 유무형적인 여러 가지 불이익도 예상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건 학문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학교에서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 형사범하고는 다른 문제라는 거죠."

- 이번 파문 이후 민간인학살 범국민위 상임대표직에서 사퇴하신 걸로 아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공항에서 체포돼 유치장에 들어간 바로 다음날 내가 물러나겠다는 의사표명을 했어요. 현실적으로 갇혀있는 상태에서 대표직을 수행할 수도 없었고, 정말 전쟁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못찾고 있다가 겨우 해결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는데, 그게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는다면 엄청난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 이번 일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온갖 매도를 당하고 폐지를 주장해오신 국가보안법으로 재판까지 받게 된 데 대해 억울하진 않습니까?
"억울하다기보다는 ‘정말 분단의 벽, 냉전의 벽이 이렇게 두텁구나’하는 걸 절감했다고나 할까요. 그럴수록 평화운동,통일운동이 활성화돼야겠다는 걸 깨달았죠. 또 하나는 당시 언론사 사주의 구속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없었더라면 과연 방명록의 글이 필화사건으로 비화됐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면, 나는 없었다고 봐요. 다시 말해 올해가 아니고 작년 방북 때 같았다면 이건 도저히 필화사건이 안됐을 거라는 거죠. 거대언론이 의도적으로 필화사건을 만들고, 그것과 재빨리 결합되는 정치세력의 고리가 얼마나 강고한지를 다시금 실감케 된 거죠."

- 경남도민일보도 선생님의 방명록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을 보더라도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철폐돼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가 재향군인회 등 단체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바 있습니다. 혹시 교수님도 개인적으로 그런 단체나 사람들의 협박이나 공갈, 항의같은 것은 받지는 않았는지요?
"93년 <역사비평>에 미국과 한국전쟁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 때문에 군인들 단체 등 수십 개 단체로부터 고발당한 적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 학살 관련 심포지움을 진행하면서 참전용사회 등 퇴역군인 집단과 여러가지 충돌이 많았었죠. 그런데 다행이랄까, 이번엔 휴대전화도 없고 안받으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 그런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처절한 한국전쟁을 3년간이나 겪었고, 분단과 전쟁을 통해 정말 엄청난 피해나 쓰라림, 고통, 질곡을 겪어왔습니다. 그분들 개인의 경험이 비극이고 형극이었듯, 다른 쪽에서도 그런 형극과 비극을 겪었다는 것을 인정해줬으면 합니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건 한쪽만 당하는 게 아니고 서로서로 당하는 겁니다. 그것을 화합으로 승화시키지 못했을 때 분단에 따른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선 해결이 안됩니다. 이젠 미래를 전망하는 입장으로 돌아가 어떻게 풀 건가 하는 고민을 할 땝니다. 오히려 늦었죠.

흔히 36년 일제지배라고 하지만 사실은 50여 년을 우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최소한 종군위안부로 20~25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쫓겨나 이 땅을 등진 사람이 600만, 징용이 30~40만, 그밖에도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고 당했습니까? 그런 일본, 이민족과도 벌써 35년전 손을 잡았는데, 동족끼리도 계속 이렇게 대립만 한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 언론에도 된통 당하셨는데, 특히 문제가 된 언론보도가 있던가요?
"문제가 되죠. 만경대는 '지역'입니다.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김일성 생가가 있는 지역이지만, 조금 더 아는 사람은 셔먼호를 격퇴시킨 곳입니다. 반침략 반외세 민족자주의 상징인 곳이죠. 또 만경대는 김일성의 증조되는 사람이 소작인으로 힘든 삶을 살아간 장소로 가난한 농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김일성의 생가가 있으므로 주체사상과 연결할 수도 있지만, 김구 선생이 방북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북한문제전문가에겐 다양한 배경과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곳이 만경대라는 곳입니다.

나에겐 만경대학원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가 컸죠. 그런데 언론이 만경대를 곧 주체사상신봉으로 치환해버린 것은 해석권의 독점이라는 겁니다. 이는 파시즘 체제에서 모든 해석을 국가의 공식적인 해석 하나로만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언론이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스스로 파시즘적 여론독점을 하고, 그걸 근거로 단죄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언론의 모습이 아니죠."

- 그럼 만경대 정신이란 대체 뭔가요?
"94년과 95년에 제가 쓴 논문을 보면 동부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경제난과 식량난이 그토록 심각하던 북한이 왜 쉽게 망하지 않는가? 그게 저의 의문이었어요. 당시 어떤 영국 학자는 '1년내 북한이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대개 정권붕괴는 세 가지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상층 권력부에 의한 것이고, 둘째는 민중항쟁에 의한 것, 그리고 민중항쟁에 의해 상층엘리트 분열이 일어나는 연계이론, 이런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상층엘리트 안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중 만경대학원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봤어요. 항일투쟁을 했거나 독립운동에 돈을 댔거나 공헌을 한 사람들, 그 자녀들을 그 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시켜 북한의 상층권력 엘리트로 충원했기 때문이죠. 여기엔 용정의 상층엘리트들도 들어갔고, 당시 남쪽에도 북한에서 추천요청을 보낸 걸로 알고 있어요. 이렇게 후손들에게까지 보상해줌으로써 민족정기를 세우려 한 곳이 만경대였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96년에 낸 책 2권에서 4군데나 언급한 적이 있어요. 이렇게 저한테는 만경대학원이 친밀했고, 그래서 대동강서 만경대로 가는 버스안에서 안내원에게 만경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죠. 그러다 우연히 방명록을 봤고 만경대학원 정신을 썼죠. 이를 연구했으니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고, 가벼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쓴 겁니다. 이는 통일운동가나 북한전문가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라고 봐요."

- 당시 방명록의 글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지금도 그 소신엔 변함이 없나요?
"그렇죠.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평화와 통일시대가 열렸는데, 어떻게 하면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통일기반을 만드느냐가 우리의 과제 아닙니까. 그런 차원에서 저는 문익환 목사님 말씀처럼 남북한이 서로를 '고무찬양'해야 한다고 봐요. 북한이 남한에 와서 칭찬해주고, 우리가 북한 가서 칭찬해줘야 통일기반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이렇게 통일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많은 사람이 주눅 들어 말을 못한다는 것만큼 반통일적인 일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방명록 사건을 계기로 자성하고 반성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내가 학자가 아니라 통일운동가적 사고를 가졌더라면 좀 더 전략적 사고를 했을텐데, 남쪽 상황이 대북정책 흠집내기에 혈안이 돼 있는 상태에서 희생양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정세인식을 통일운동가라면 했어야 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학자로선 자격이 있을런지는 몰라도 통일운동가의 자질은 없지 않느냐, 그래서 통일부장관 해임까지 초래한 이런 사태에 대해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합니다."

- 여전히 재판에 계류중인데, 지난번 월간 말지와 인터뷰에서 상당히 강력하게 국보법의 문제를 지적하셨고, 오늘도 강의주제가 ‘통일과 국가보안법’인데, 재판에 불리한 요인이 되진 않을까요.
"내가 말지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 ‘막걸리 보안법’ 얘길 하셨죠.
"하하, 그거야 만천하가 다 아는 얘긴데 뭘. 상관없어요."

- 오늘 가톨릭여성회관에서 하실 강의제목이 당초 주한미군문제에서 국가보안법 문제로 바뀌었는데, 이유가 있나요?
"주최측에서 요청한 부분은 이미 진보평론에서 논문으로 발표했고, 그 논문 보면 다 알 수 있어서 굳이 그것보다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직접 홍역을 치렀고, 국보법이 너무나 통일에 직접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서 내 얘기를 중심으로 하고 싶어서지 다른 뜻은 없어요."

- 올해 연세가?
"쉰 일곱, 45년생입니다."

- 해방동이시네요? 마산의 김영만 대표와 갑장이시구요(김영만 마산 열린사회 희망연대 대표는 강 교수와 함께 민간인학살 범국민위 공동대표이다).
"어, 그래요? 그건 몰랐네?"

- 마산에 형님이 계시다고요?
"친형님은 돌아가셨고, 형수님이 살고 계십니다."

- 창녕이 고향이시죠?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가이셨다던데.
"고암면 고연정에서 나서, 고암초등학교와 창녕중학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 밑에서 논어맹자를 배웠죠. 내가 대학 다닐 때 서울서 타계하셨는데, 파리장서사건 때 김규식 선생, 곽종석 어른 등과 함께 창녕 유림 대표로 참여하셨죠. 당시 할아버지도 이 때문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큰 고초를 겪었죠."

- 고향에 지금도 살고 계시는 가족이나 친지가 있습니까. 집은요?
"얼마전에 가보니 집은 폐허가 됐고, 원래 10호정도밖에 안됐던 마을도 지금은 한집만 남아있더군요."

- 나중에 낙향해서 사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현재로선 힘들 것 같아요. 어차피 통일운동을 계속할텐데 여기선 어렵지 않겠어요?"

- 앞으로 꼭 하시고 싶은 일은 뭡니까?
"어차피 학자는 학문을 해야죠. 민족.민중.비판학문을 내 학문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를 거쳐 오랜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이 엄청나게 은폐되고 왜곡돼 있습니다. 요즘 일본 교과서 왜곡을 문제삼지만 사실 우리나라 교과서의 왜곡이 일본보다 더 심하다고 봐요. 이런 은폐되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게 학자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손을 대서는 안되는 주제가 있었죠. 한국전쟁이나 항일무장투쟁, 주한미군, 미국의 한반도 정책, 민간인학살문제 등이 그것이죠. 이걸 건드렸다간 옥살이를 각오하거나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죠. 한마디로 학문의 자유가 없는 거죠. 여기에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나가야 하는데, 과연 우리사회 지식인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 하면 회의적입니다. 그건 직무유기예요.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민족화해와 통일기반 마련을 위해서라도 학자들이 성역허물기에 나서야 합니다. 앞으로도 학자의 양심을 걸고 성역허물기를 계속하는 것, 그게 저의 임무입니다."

- 마지막으로 고향 독자에게 한말씀.
"남북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는 냉전제도.냉전문화.냉전의식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 이런 냉전의식에다 지역주의까지 서로 합쳐졌어요. 적어도 김영삼 정권땐 지역주의와 냉전이 합쳐지진 않았죠. 정말 이래 가지곤 민족의 평화와 통일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이젠 정말 장기적 전망을 갖고 평화와 통일을 일구기 위해서 과거의 냉전의식에서 과감히 벗어나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끝낸 후 그는 민간인학살문제 해결에 경남도민일보가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인터뷰를 통해 그가 정말 ‘빨갱이 교수’로 매도당해도 좋을 인물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지만, 적어도 그는 ‘확신범’이며 ‘양심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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