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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글 '정직하고 착하면 성공 '못'한다?'(고대생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며)는 근래의 내 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의견'도 꽤 많이 접수되었다.
독자들의 의견들 중에는 내게 새로운 각성을 안겨 주는 것도 있었고, 자못 심금을 울리는 내용도 있었다. 익명 공간에 의존하는 난폭한 표현 방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예의를 갖춘 의견들이어서 제법 나이 먹은 축에 속하는 나로서는 더럭 고맙기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독자들의 의견들 중에는 대체 '성공이란 뭘까?'라는 강한 의문 제기도 있었다. '성공이라는 것을 너무 획일화시키는 것 아닐까요?'로 이어지는 그분의 의문은 내 가슴에 강한 파장을 안겨 주었다.
처음 글을 쓸 때 '인생의 성공에 대한 단순하고도 획일적인 가치 규정의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속적인 성공만이 성공인 것은 아니다, 속세의 가치를 초월하는 삶이 진정한 성공이다'라는 생각은 내가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고, 내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세속을 초월하는 인생의 진정한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름껏 노력하고 있다.
그런 내가 지난번 글에서 인생의 성공에 관한 논법을 세속적인 관점 안으로 국한시킨 것은, 고대신문사의 그 설문조사 영역이 '세속적인 성공'을 기준하여 제시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 설문조사 영역에 부합하는 논법이 적합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글의 말미에 배치한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격려와 조언을 주고자 하는 대목에서 세속적 성공만이 성공의 전무는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과 그 글이 지역신문들에도 게재될 것이기에 지면 사정도 생각해야 해서, 그것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거듭 확언한다. 세속적 성공만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며,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는 삶이 진정한 성공이다. 나는 세속을 초월하는 목표를 향해 이 세상의 가시덤불 속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간다.
지천명의 세월을 넘기고도 보잘 것 없는 내 몰골과 갖가지 난마(亂麻) 속에서 허덕이는 내 신세를 스스로 위무하는 것이기는 할지언정 그것으로 나를 변명할 의향은 추호도 없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나는 중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세상을 희구하며, 하늘에 공덕을 쌓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난마 같고 깨끗하지 못한 것은 나라와 사회를 경영하려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성공 가치에 너무 얽매어 살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마음, 하늘에 공덕을 쌓는 정신으로 세속에서의 모든 일을 도모해야 하거늘, 한 시절 일신의 광영만을 성공으로 삼고 패권과 경쟁만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현세에서의 응보를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의 거짓과 불의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면서 하늘에 선업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노력만큼 이 세상이 내 생애 동안에 변화되지 않더라도 실망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일찍 변화되지 않는 만큼 사람들이 하늘에 쌓는 선업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세상이 거짓되고 불의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하늘에 선업을 쌓는 의인들을 하느님께서 계속적으로 찾고 부르시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어차피 그런 한계를 안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둠은 빛을 가능케 하고, 세상의 불의는 의인들의 탄생을 돕는다. 세속에서의 성공만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라고 해서 세상을 경멸하거나 체념하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서는 하늘에 선업을 쌓기가 어렵다. 현실에 초연한 태도는 자칫 무지와 방관으로 떨어지기가 쉬운 법이다.
너무 종교적인 담론이고 시건방진 변설일지 모르지만, 나는 지천명의 세월을 넘기면서 내 삶의 목표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내 지각과 양심이 움직이는 대로 행위하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크고 작은 온갖 노력으로 하늘에 선업을 쌓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의 일단을 나는 나이 오십이 되던 해인 지난 1997년 칼럼 형태의 글 하나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그 글을 지역신문에 발표했다. 벌써 4년 전인 그해 <태안신문>에 발표했던 그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의 변설을 마친다.
후회할 땐 늦으리
꼭 유행가 제목같이 느껴지는 말이지만 '후회할 땐 늦으리'라는 이 말은 내게 각별한 감회와 각성을 갖게 만든다. 그 어떤 말보다도 명징한 질감으로 가슴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을 최초로 접한 때는 초등학생 시절이다. 아마 저학년 시절에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확실한 기억은 없고, 5·6학년 때 집중적으로 이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열심히 공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장래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후회하게 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장차 어른이 되면 내 말의 뜻을 알게 될 테지만, 이 말을 고마움으로 기억해야지 후회스러움으로 기억해선 안 된다. 후회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대략 이런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말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는 것은 선생님이 이 말을 수시로 반복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말은 선생님들의 '전매 특허'와 같은 말일 수 있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선생님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선생님의 간절한 그 말이 학생들 모두에게 별로 큰 작용을 낳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경우가 태반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마이동풍들 중의 하나였다. 선생님의 그런 말에서 '장래'에 대한 절실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선생님의 그런 말은 중학생 시절에도 들었고 고등학생 시절에도 들었다.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에 그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은 은퇴하셨거나 작고하신 담임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여러 은사님들이 자주 그런 말을 하셨다.
"그러다간 후회하리. 후회하는 놈 많을 거다. 훗날 눈물 흘리며 후회하려거든 멋대로 놀고, 후회하지 않으려거든 정신 바짝 차려라. 어른이 되어보면 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선생님들의 그런 말은 일종의 버릇이기도 하면서 간절한 뜻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말 어른이 되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야 나는 비로소 선생님들의 그 말의 뜻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정확한 말임을, 그리고 그 말이 나에게 정통으로 들어맞았음도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가슴에 회한이 가득해진다. 왜 그 시절에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챙겨 들으려 하지도 않았는지, 후회스럽기 한량없다. 선생님의 그 말에서 절박한 각성 같은 것을 얻고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스스로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나빠하고 반감만을 가졌던 나 자신이 그렇게 못나 보이고 안타깝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 본들 다 소용 없는 일임을 잘 안다. 선생님들 말씀의 분명한 '실증'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 사실이 또한 슬프고 절망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뒤늦게나마 충실히 상기해 봄으로써 초반의 실패에 대한 만회를 시도하고자 한다. 뒤늦은 각성이나마 알뜰히 챙겨보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그리하여 그 말의 상기와 각성이 때늦은 후회로 이르거나 머무르지 않고 내 삶의 전체와 종국을 잘 갈무리하는 것이 되기를 소망한다.
현실적인 삶을 놓고 볼 때는 그것이 별로 큰 가능성을 지니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50고개에 다다른 나이이니 또다시 후회하지 않을 '내일을 위한 오늘의 노력'이 아직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로지 현실적인 목표만을 추구한다면 별로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감히 영생을 생각한다. 후회하지 않는 상황을 저 '하늘 나라'에 두려고 한다. 그러므로 '후회할 땐 늦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내 일생의 경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후의 세계에 대해 깊은 생각들을 하지 않으며 산다. 인류 역사와 문명의 발달은 '왜?'라는 물음표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가능했다. 의문 부호야말로 모든 삶의 기본이고 원동력이다. 그 물음표에 투철했던 사람들이 선봉에 서서 인류의 삶을 발전시켰다.
그런 위대한 발명가 과학자 사상가들은 '인간은 왜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가?' 라는 기본적인 물음표에도 충실했다. 자신들의 두뇌와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과 덧없는 것임도 깨달았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물음표 앞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살아가는 현상을 잘 알며 안타까워 한다. 여기에서 더더욱 '후회할 땐 늦으리' 라는 경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한다.
사후 세계가 없다면 누구도 후회하지 않고 똑같이 손해 볼 것도 없겠지만,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사람에 따라선 뜻밖의 그 사후 세계에서 부질없이 후회하는 영혼도 많을 것이다. 그 영복 영벌의 세계에서 당황하며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후회가 통하는 구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사후 세계에 들어가고 나서는 정말로 아무 소용이 없다.
'후회할 땐 늦으리'라는 경구를 이 세상의 현실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말자. 그것을 저 영생의 세계로까지 확대하는 것도 분명한 지혜일 것이다. 사후 세계에 가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자. 우리 모두 다 함께!
(1997년 <태안신문>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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