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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뒷편에 베트남 쌀국수집이 하나 있었다. 벌써 1년은 된 일 같다. 사람 만날 일이 있어 광화문에 나갔다가 그 집을 발견했었다. 크지도 않은 체인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4, 5년 전에 베트남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생각이 났던 까닭이었다.
그때 함께 간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호치민 시(옛 사이공) 거리를 나 홀로 걸었었다. 오토바이와 시클로의 물결, 숨을 막히게 하는 지독한 매연, 평지 사방으로 뻗어나간 낮은 건물들, 파스텔 톤 밝은 색조로 칠한 베트남 가옥들, 그리고 작열하는 남국의 태양 아래 잘 자란 나무들……. 나는 외로운 이방인의 사치를 만끽하며 유영하듯 방향도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걷다가 우리네 도시 변두리 콩나물 해장국집 같은 허름한 쌀국수집을 발견했다. 갑작스레 시장기를 느낀 나는 우리네 국수와 별다를 바 없는 새하얀 쌀국수로 끼니를 때울 생각이 났다. 선뜻 문턱을 넘어 들어가 우리네 도시 변두리 콩나물 해장국집 할머니 같은 할머니에게 몸짓 주문을 했다.
우리네 도시 변두리 콩나물 해장국집에 들어간 손님처럼 나는 할머니가 듬뿍 퍼준 쌀국수를 맛있게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인심도 좋게 쌀국수를 한 그릇 가득 차게 퍼주고 중국말로 '퍼'라고 하는 야채까지 듬뿍 얹어 주었는데, 그 향이 보통 지독한 게 아니었다. 지독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해서 도저히 젓가락질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낯선 이방인의 식사를 슬금슬금 훔쳐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나. 울며 겨자먹기라는 말이 바로 그런 때 해당하는 말이렸다.
겨우 겨우 표정관리를 해가며 그릇의 삼분의 이 정도를 비우고 일어났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여유를 부리며 싸디싼 베트남 돈을 지불하고 나왔지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금방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머리속에서는 한 생각이 일었다. 나라마다 이렇게나 다르구나. 한국사람 즐겨 먹는 깻잎이나 쑥갓 향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과연 견뎌낼 수나 있을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기묘한 일이로구나…….
그러자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슬픔이, 저녁밥 짓는 시골집 굴뚝 외줄기 연기처럼,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그런 당연한 일이 갑작스레 슬픈 사연으로 둔갑해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뒷편에서 쌀국수집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러나 나는 그 '옛친구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일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꼭 한 번 들러 필시 한국 사람 입맛에 맞도록 약화되었을 베트남 야채의 독한 향기를 다시 한 번 맛보겠노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두어 달 지났을까. 나는 정말로 그 베트남 쌀국수집을 베트남에 있는 쌀국수집 할머니를 머리 속에 그리며 찾아갔다. 그러나 없었다. 쌀국수집은 그 사이에 간판을 내려버린 것이었다.
나를 맞아준 것은 문 옆에 걸려 있는 베트남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의 까만 나무그림 한 장뿐, 유리문에는 새로운 임대인을 찾는 주인 백 공고가 덜렁 한 장 나붙어 있었다.
맥없이 돌아서는데 괜히 마음이 허전하고 심란했다. 아니 슬펐다. 고향의 맛 그리워 찾아왔다가 닫힌 문 뒤로 하고 돌아선 베트남 사람처럼 나는 갈 곳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내 앞에는 거대한 이방의 도시가 유령의 그림자처럼 음산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그렇게나 이상하고 슬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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