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프랑스 와인산업

등록 2001.11.17 08:41수정 2001.11.20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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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주재 외교관들의 만찬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 대사가 프랑스 대사와 담소를 나누다 넌지시 물었다.

"대사님은 스페인에서 사신지 꽤 됐는데 프랑스하고 스페인 와인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맛이 좋던가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프랑스 대사인데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와인을 좋아한다고 해 둡시다."


짓궂은 질문에 '외교적인' 답변으로 모면했지만 추락하는 프랑스 와인산업의 위상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해 마다 이맘때면 '보졸레 누보' 열풍에 휩쓸리고 와인하면 프랑스를 떠올리는 한국인들에게는 의외일지 모르지만 프랑스 와인산업은 지금 안팍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대규모 와인업체들이 저렴한 가격과 젊은층을 겨냥한 산뜻한 맛의 와인으로 승승장구 하고 있는 반면에 프랑스 와인업계는 안방마저 내주며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프랑스 와인산업은 연 65억달러의 매출로 아직까지 수위를 지키고는 있지만 수출은 전년 대비 5.4%가 떨어진 46억달러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특히 미국시장 점유율이 지난 3년 사이 7%에서 5%로 주저앉는 동안에 호주산 와인은 무려 3배나 매출이 증가해 3%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프랑스 와인산업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원인으로 아직도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전근대적 생산체계를 꼽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인 생산방식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프랑스 당국의 규제위주 정책도 한 몫 거들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산업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적으로 와인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프랑스 와인은 450곳이 넘는 생산지와 포도등급에 따라 매우 복잡한 분류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니 책 한권에 이를 전문지식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암호같은 프랑스 와인의 라벨을 해독해 낼 재간이 없다. 전문적으로 와인을 수집하고 즐기는 매니아 층을 제외한다면 라벨부터 이렇게 복잡해서야 보통소비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

캘리포니아와 호주등 신대륙의 와인 제조업자들은 우선 와인의 종류를 산지에 관계없이 포도종자에 따라 <멀롯>, <카비네 소비뇽>, <샤도네> 등으로 간단하게 분류해 처음 와인을 찾는 소비자들이 손쉽게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여기에다 국경을 넘나드는 대규모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운 이들 다국적 와인업자들은 신세대 소비자들을 겨냥한 강력한 마케팅으로 미국, 아시아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에서조차 새로운 와인 소비자층을 대거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던 것.

결국 소비자들이 기억하는 브랜드는 다섯 손가락을 넘기 힘들다는 마케팅의 격언을 충실하게 따른 다국적 와인업체에게 신비스런 이미지 하나로 한 병에 수백달러가 넘는 고가의 와인 판매만을 고수하던 프랑스 업계는 판판히 패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대의 와인왕국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은 지난 1960년의 100리터에서 55리터로 급락한 반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북미 지역의 와인 소비량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신흥시장의 젊은 소비자들에게 햄버거, 콜라를 팔듯이 와인을 팔아 치운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다국적 업체들에게 가내 수공업에 의지하는 프랑스 업자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

커다란 창고에 수백가지의 진귀한 와인을 모아 놓고 음미하는 와인 수집가들에게는 급속한 와인의 대중화가 못마땅하고 심지어 '천박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와인의 즐거움을 모르던 일반 소비자들은 저렴한 와인을 손쉽게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다국적 와인업자들의 존재가 오히려 고마울 지도 모를 일이다.

jean

덧붙이는 글 | *기사 본문의 사진은 나파-소노마 지역의 풍경만을 전문적으로 촬영해 온 사진작가 Nicholas Elias씨의 작품이며 저작권자의 승인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나파-소노마 지역의 다른 사진을 보고 싶거나 구매하실 분은 www.WaterPear.com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본문의 사진은 나파-소노마 지역의 풍경만을 전문적으로 촬영해 온 사진작가 Nicholas Elias씨의 작품이며 저작권자의 승인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나파-소노마 지역의 다른 사진을 보고 싶거나 구매하실 분은 www.WaterPear.com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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