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박완서 선생님께

등록 2001.11.20 15:35수정 2001.11.2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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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지방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출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태안에서 공주까지 먼길을 가서 여섯 시간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일이 좀 고달프긴 했지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에게 글쓰는 법과 문학을 가르치고, 부분적으로나마 인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엄숙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글쓰는 방법보다도 정신과 인격을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의 문예창작과가 방송극작과로 간판을 바꿔 다는 바람에 나의 교수 시늉은 일년 만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교수 시늉을 일년 만에 그만두게 된 것보다도 그 학교의 문창과가 손쉽게 방송극작과로 바뀌는 현실이 내게 서글픔을 안겨주더군요.

나는 지금도 낭만적인 기운을 자아내기도 하는 '문창과'라는 이름이 그 대학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칫 순수문학, 또는 본격문학의 퇴보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한 두려움까지 갖게 됩니다. 문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인데…. 그리고 순수문학은 모든 창작의 기본인데….

대학이 그처럼 정신적 토대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기능'만을 중시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학의 그런 경우는 우리 사회의 일방적인 기능 중시 풍조―실리와 야합하기 잘하는 천박한 속성을 그대로 상징하고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좀 과격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대학에 출강하던 시절 한 번은 일학년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조물주께서 우리 인간의 가슴에 담아주신 갖가지 고귀한 마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꼽자면 무엇이겠느냐―.


여러 가지 단어들이 나왔습니다. 사랑, 기쁨, 슬픔, 모성애, 부성애, 용기, 희생 정신, 모험심과 개척정신 등등…. 의외로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단어들은 쉽게 나오지 않더군요.

동물들에게도 있는 본능적인 것 말고, 오로지 사람에게만 있는 것 ―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사람이 스스로 키우고 가꾸기도 해야 할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 세 가지를 꼽아보라는 주문이어서인지 학생들은 필요 이상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마음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꼽아보았습니다.

'감사지정·동정심·수치심.' 즉, 남의 은혜와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남의 불행한 처지를 보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이 세 가지 마음이 인간이 꼭 지니고 살아야 할 가장 고귀한 마음이라는 것이었지요.

감사지정과 측은지심과 수치심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마음들이 아닙니다. 그 세 가지 마음들은 불가분의 관련 속에서 상호 작용하며 존재하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와 같은 것이지요. 이 세 가지 마음이 긴밀하게 유대하며 끊임없이 자극과 환기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사람은 따뜻하고 넓은 가슴,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나는 이 세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날 여섯 시간의 강의를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이 세 가지 마음을 가지고 3일 동안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학생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특별히 기억되는 타인에 대한 고마웠던 일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또 하루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확실한 측은지심에 의해서 뜨겁게 동정심을 발휘했던 경험들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는 뼈저리게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을 반성했던 일이 있으면 (발표할 수 있는 일이면) 발표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발표로만 그치지 않고, 그 세 가지 마음을 주제로 글을 쓰도록 숙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학점으로 연결되는 것이라서 학생들은 대체로 열심히 발표에 참여하고 또 글을 쓰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와 글을 듣고 읽으면서 소재의 빈곤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라서, 그리고 대개는 좋은 시절을 사는 처지들이라서 그들에게는 감사지정과 동정심, 그리고 수치심과 관련하여 별다른 경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고귀한 마음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에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주고 도와주는 마음,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며 반성하는 마음들이 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필요 조건임을 거듭 명심하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가장 고귀한 이 세 가지 마음 중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고도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수치심'임을 또한 확인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치심이 완전히 실종되어 종적을 찾을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나는 이런 현실을 진실로 뼈아파하며, 수치심의 회복을 갈망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전형적인 부류는 자고로 정치인들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판 사람들은 도대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정치배의 수준을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설치고 야단 떠는 풍경을 너무나 쉽게 목도합니다. 정치인들의 잦은 이합집산, 철새들의 속출, 표리부동, 거짓말의 양산 따위들이 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치에서 나오는 것들이지요.

정치인들이야 생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렇다치고, 수치심의 실종 사태는 지식인 사회에서도 참으로 심각한 실정입니다. 명색이 대학교수요, 문인이요,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이 너무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친일과 친독재로 참혹하게 얼룩진 과거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늘에는 엄청난 탈세 범법을 저지르고도 정부의 탈세 적발을 언론 탄압이라고 강변하는 뻔뻔스러운 족벌언론들을 비호하는 대학교수들과 유명 문인의 곡학아세는 인간의 고귀한 마음인 수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지 싶습니다.

과거와 오늘의 부끄러움을 전혀 깨닫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그들은 미래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전혀, 실오라기만큼의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비중을 지닌 오늘의 위치에서 현실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할 때는 훗날도 생각해야 합니다. 훗날에 가서는 정녕 부끄럽게 되지 않을까를 깊이 생각하고, 부끄럽지 않을 말과 처신을 해야 합니다. 그게 지성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물론 오늘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이 내일에 가서 부끄러워할 리는 없습니다. 과거의 친일과 친독재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미당을 보면 그들의 속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혹 미당의 명성을 능가하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는 정신적으로는 미당 정도밖에 못되는 위인일 것입니다.

수치심을 잃어버린 그들의 속성과 정신 수준을 나는 그들의 말글과 조악한 처신에서 쉽게 판별해낼 수 있습니다. 유치하고도 졸렬한 주장들, 사리에 맞지 않는 엉뚱한 궤변들,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의 널판때기 위해서 저희들끼리 널뛰고 그네 타는 비겁한 행위들은 이미 그들의 특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위인들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족벌 언론사에, 모 대학 사회학과 등에, 그리고 문단 일각에 도도히 진을 치고 있는 현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현상이 꽤나 중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내 심정은 또 한번 몹시도 비참합니다. 평소 존경하던 박완서 선생님마저 수치심이 실종된 몰염치의 나락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만 현상에 나는 당혹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과거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라는 소설로 수치심을 잃은 우리 사회의 치부들을 날카롭게 파헤쳐 보인, 냉철한 현실 인식의 소유자이셨습니다. 그런 박완서 선생님이 오늘 어떻게 된 심판인지 그 자신 부끄러움을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는 안타깝기 한량없습니다.

박 선생님은 이문열의 책들이 '책 장례식'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기 전에, 또 그것에 대해서 '문학이 모독당하는' 현실로 파악하기 전에, 그리고 그런 일을 보고도 수많은 문학단체들이 침묵하는 것을 개탄하기에 앞서, 같은 문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문인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그런 사태의 전후 좌우 사정과 본질적인 의미를 좀더 깊이 통찰해야 했던 것입니다.

언어를 갈고 닦으며 그 언어로써 자신의 정신 세계를 구현하는 문인이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한 '언어 테러'와 독자들의 '깊은 상처'를 우선 가슴 아파해야 했고, 시대 정신을 이끌어가야 할 문인의 타락을 부끄럽게 여겨야 했으며, 한 시절을 대표한다는 문인의 정신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현상에 대해 같은 문인으로서 뼈저린 자괴감을 가져야 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그처럼 쉽게 또 하나의 '탁한 언어'의 소용돌이 속에 함부로 몸을 던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김동길 교수의 모습에서 느끼게 되는 '노추(老醜)의 낌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늙어서도 올곧은 지조와 품위를 잃지 않고 사셨던 몇 되지 않는 분들의 그 '노령의 기백'을 회억하면서….

나는 오늘 박완서 선생님의 모습에서 '노추의 낌새'를 느낀다고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만 내가 바라기는, 오늘 부끄러움을 모르면 내일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그 수치심 상실의 질곡 속으로 박완서 선생님은 빠져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부끄러움을 몰랐고 오늘도 부끄러움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타계하고만 한국의 대표적 문인 미당의 그 수치심 상실의 길을 박완서 선생님도 그대로 답습하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수치심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 일제로부터 발원한 수치심 상실의 길은 아직 멀고도 울울창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수치심을 회복시키는 일을 뜨겁게 전개해야 합니다. 언론 개혁 운동이 그것의 한 가지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 길에 문인들도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 수치심의 기운을 활활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제목 하나를 다시 한번 읊조려 봅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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