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쓰다보니 드디어 '비겁'이라는 단어가 나왔군요.
나는 부산의 화덕헌 씨에게 '조시'를 보내고 나서 사실 많이 괴로웠습니다. 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던 부탁을 번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름 감추기를 고수하기로 결심하면서 내 유약함과 비겁함을 위무할 수 있는 생각들을 스스로 끌어안기도 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는 어떤 확실한 계기에 의해서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밝혀지게 될 상황이 올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가서 떳떳하게 이름을 밝힌다면 오늘의 내 비겁함이 충분히 상쇄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지요.
또 하나는, 좀더 세월이 흐른 뒤에, 오늘의 언론개혁 운동이 어떤 형태로든 결실을 맺고 의미와 가치가 자리매김되어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오늘의 일들을 다각적으로 회억하게 될 때, 그 보람스러운 자리에서 화덕헌 씨나 누구에 의해서 내 이름이 거명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멋진 풍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사실 그쪽을, 그런 상황을 희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한 달도 못 가서 '조시'를 지은 내 이름을 밝히고 나선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박완서 선생님의 급작스러운 출현 때문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까지도 족벌 언론의 기반 위해서 그런 식으로 이문열 씨를 두둔하고 나서리라고는 정말이지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내가 평소 존경해 온 분이었고, 조금은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친근감을 가지고 '가톨릭문인협회' 모임에서 몇 번 뵌 적도 있고, 그분의 '측은지심'에 의한 유니세프(국제구호단체) 활동을 선망의 눈으로 보아온 처지였지요. 그러면서 박완서 선생님이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이기는 해도, 쉽게 '중심'을 잃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져왔던 거지요.
박완서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충분히 폭탄적인 그 발언들을 보고 들으면서 나는 심한 당혹감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망과 섭섭함을 감내해야 했고, 마침내 박완서 선생님까지 동원하여 이용하고 만 족벌 언론의 교활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이문열 책 반환 행사'와 관련하는 모든 일의 전후 좌우 사정을 총체적으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일방적으로 '문인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만을 주장할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이문열의 '상처'만을 지극히 염려할 뿐입니다. 족벌 언론과 결탁한 이문열의 기만적 글쓰기와 언어 테러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픈 마음 따위는 전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상처'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출현과, 이문열이라는 대가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문학 단체들에 대한 박 선생님의 공박으로 말미암아 조만간 문단 사회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문열 책 반환 행사'가 또 한번 족벌 언론들의 왜곡의 도마 위에 올라 다시 난도질을 당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물론 족벌 언론들에 의해 아무리 왜곡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그 행사의 본질적 의미와 메시지는 더욱 커지겠지만….
이미 족벌 언론들의 선정적이기조차 한 보도들에 의해 홍위병들의 난동적인 푸닥거리 정도로 비하된 '이문열 책 반환 행사'는 박완서 선생님의 참견해 의해 좀더 왜곡의 굴레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정답은 아니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행사를 연 사람들이 엄청난 위력의 지면을 등에 엎은 저들의 공격을 감내하다가 마침내 박완서 선생님의 비난까지 뒤집어쓰게 된 상황 속에서도 내가 계속 이름을 감춘다는 것은 더욱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행사를 치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의식도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같이 이름이 크신 분도 그렇게 가시덩굴 우거진 싸움밭에 아무 거리낌없이 나서시며 이름을 밝히는데, 나같이 작고 미약한 삼류 작가가 저편 사람들에게 들킬세라 이름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사실 너무도 격이 맞지 않고, 형평도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조시'를 인터넷 세상에 발표하면서 이름을 감췄던 내 비겁함을 고백하니, 수많은 격려 속에서도 난폭한 욕설들이 게시판 곳곳에서 독기를 내뿜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비방이나 욕설은 충분히 예상을 했지만, 증오에 가득 찬 무시무시한 저주까지 듣게 될 줄은 정말 상상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일부 독자들의 증오에 가득 찬 욕설과 저주를 접하면서 엉뚱하게도 저 민주화 운동 시절의 최루 가스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는 학생들에게 눈을 흘기던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의 말소리, 수배 학생들을 찾아다니던 공안 형사들의 번뜩이던 눈빛도 어른거리며 내 시야를 어지럽히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옮기기도 어려운 그 무지막지한 욕설들에 비하면 정보동 김홍만 선생의 비판은 비난과 비방의 내음이 있기는 해도 참으로 온건한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김홍만 선생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상식과 합리성이 충만한 세상, 민주주의의 참다운 꽃을 보게 되는 그 길은 아직 먼 듯싶습니다. 어떤 분이 "안티조선이나 안티이문열이 중요한 게 아니다. 국민 대중의 참다운 민주 의식을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을 망각하고 본말이 전도된 행태를 보이고 있는 언론개혁 운동을 그래서 나는 지지할 수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신 것을 정보동에서 읽었는데, 국민 대중의 참다운 민주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언론개혁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분이 모르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문열 씨가 어떤 글에서 곡학아세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그 증거를 대라"고 내게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나는 작가에게는 기본적인 정신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문열 씨가 즐겨 사용하는 현학이 교양소설에 필요한 것이긴 해도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나친 욕심일지 모르지만 작가는 정신과 삶 자체가 총체적으로 문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질문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이문열 문학의 성취가 곡학아세라는 한마디 말로 매도당하는 듯한 현상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아울러 이문열 문학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이문열를 읽었던 것이 전부지만, 작품에 따라서는 이문열 문학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삶은 오로지 작품만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작품을 통해서만 그의 정신 세계가 구현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작가의 인격을 구성하고, 그의 정신 세계를 풍미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문열 씨의 일련의 처신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참으로 좋은 조건에서 시대 정신을 앞장서 열어 가지 못하고, 족벌언론과 결탁하여 거대 지면을 독점한 상태에서 기만적 글쓰기로 모든 개혁 세력에 찬물을 끼얹은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시대 최대의 악령인 지역감정을 직·간접적으로 조장한 잘못은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것 자체가 곡학아세의 범주에 들고도 남는다고 나는 봅니다.
정보동의 김홍만 선생은 일단의 사람들이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 앞에까지 찾아가서 '이문열 책 반환 행사'를 벌인 일을 몹시 비판하시면서 그것을 파괴적 행위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안티문화의 표현 행위가 통념적으로 사회의 미덕이라고 불릴 만한 일이나 관념에 대한 훼손 행위라면 지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그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모든 일이 통념화되어 있다고 해서 다 미덕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 통념 때문에 발전의 통로가 막혀 있는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통념에만 얽매어 산다면 무슨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통념이라는 것이 곧바로 보수와 연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통념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김홍만 선생께서는 또 그날의 그 '안티문화' 행위를 이문열이라는 대작가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행위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나는 '치명상'이라는 용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작 수십 명의 행사 하나로 이문열 씨가 치명상을 입으리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기우이며, 얼토당토않은 발상입니다. 이문열 씨는 자신의 2600만 권의 책 중에서 '반납 운동'으로 모아진 733권은 몇 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지나친 오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날의 행사에서 '조시'가 낭송되고 만장이며 영정이며 관이 사용된 것만을 가지고 족벌언론들은 오로지 '책 장례식'으로만 표현하면서 갖은 호들갑을 다 떨고 있습니다만, 이문열 씨의 책은 단 한 권도 땅에 묻히지도 않았고, 불에 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고물상에게 넘겨졌고, 그 책들은 다시 유통되고 있습니다.
김홍만 님의 말대로 그 행사는 단지 '표현 행위'였을 뿐입니다. 행사를 치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자 최적의 표현 행위였고, 나름껏 최대한 메시지를 표출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족벌 언론에 의해 또 한번 철저히 무시되고 왜곡되었지만….
내가 이문열 씨를 비판하는 것은 김 선생의 시각처럼 그를 온통 부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공존의 미덕을 파괴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내 독선에만 의지하여 벌이는 일도 아닙니다.
비판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 반성의 미덕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 사회의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날의 행사에 관한 좋은 글 하나를 김 선생께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우리모두'나 '창비'에 가시면 사회평론가 진중권 씨가 11월 26일자 '대한매일'의 '대한광장'에 쓴 '모욕 안 당할 권리'라는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글을 김 선생께서 참고해 보셨으면 합니다. 포괄적 판단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언론개혁 문제는 참으로 단순한 일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직·간접적으로 지역감정 문제가 결부되어 있고, 내년의 대선과 연관하여 정치적 이해 관계가 미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정녕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본질을 보는 눈이 아쉽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최대 단점 중의 하나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지엽적인 문제들에 얽매이기를 잘한다는 것이죠. 모든 사안을 바라볼 때는 정(正)과 사(似)를 분별하려는 노력,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진실과 정의에 기초하고 부합시키려는 선의적인 마음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홍만 선생님, 쓰고 보니 글이 너무도 길어졌군요. 미안합니다. 글을 한 번에 올리지는 못할 것 같고, 4·5회로 나누어 올려야 할 것 같은데, 더욱 미안합니다. 김 선생님 덕분에 또 한바탕 큰 작업을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느라고 거의 밤을 새웠습니다.
내 생각에는 언론개혁 운동이 우리 사회에 참으로 필요하고도 소중한 일로 여겨져서 사명감을 가지고 기꺼이 동참하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정력을 너무 낭비하는 것 아니냐?" "자신의 박약한 소설 능력을 호도 하려는 술책 아니냐?"는 등의 충고와 비아냥들이 내 옆구리에 걸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작가적 양심으로는 당대의 중대한 현실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작업도 참으로 뜻 있고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운동을 통해 지금 많은 것들을 배우며 얻고 있습니다.
요즘 무척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이것저것 챙겨 드리는 일, 지방문학동인지 '태안문학'과 '소설충청'을 만드는 일, 교회 봉사 활동 등으로 몹시 분주합니다. 책을 만드는 일에는 비용을 마련하는 일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긴 글을 쓰고 나니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입니다. 이 글이 김홍만 선생께 (사고의 확장에)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너무 시간이 없고 제약이 많아서 다음의 논의들은 피하고 싶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로 하여금 이런 작업을 하게 해 주신 김 선생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이만 맺겠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