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권하는 회식문화 이제는 바꾸자

2차 강요하는 기업 내 회식문화

등록 2001.12.06 12:36수정 2001.12.0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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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는 기본이고, 3차는 선택 아닌가요."

지난 5일 저녁 7시, 업무를 정리하고 영업부 회식 때문에 충무로의 한 숯불갈비 집으로 자리를 옮긴 최모 대리는 인원파악으로 정신이 없었다.

"아주머니, 여기 돼지갈비 10인분, 소주 6병도 함께."
부장을 포함한 영업1부 9명의 직원이 회사근처 고깃집에 모여 회식을 하는 자리, 3명의 대리 중 선임인 최 대리는 인원파악에 회식 메뉴를 시키느라 부산했다.

"회식의 메뉴는 물론 2차, 3차까지 장소를 섭외하느라 힘들었다"는 최 대리는 연거푸 소주잔을 기울이며, 후배들과 회사 이야기로 정신이 없었다.

서열별 잔 돌리기

부장이 부서원들에게 소주 한 잔씩을 돌렸고, 이어 3명의 대리가 차례로 부서원들에게 소주를 권했다.

밤 9시, 1차 회식을 마친 영업부 사람들은 집이 먼 사원들을 제외한 6명의 부원들이 최 대리가 마련한 단란주점으로 2차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9시밖에 안됐는데, 2차 갔다가 택시 타고 가면 될 것 아닌가."
술이 거나하게 취한 부장의 말에 이 대리는 "죄송합니다. 오늘 자식놈 생일이라 좀 일찍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만 했다.

북창동의 단란주점 입구에서 최 대리는 평소 낯이 익은 듯한 사람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일행들을 한 단란 주점으로 안내했다.


최 대리는 "부장님, 오늘 한번 근사하게 한번 마셔보시죠"라며 일행을 단란주점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접대부에, 폭탄주까지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은 지난 5일, 거래처 사람들과 이른 망년회 자리를 마련했다.

저녁식사와 함께 간단한 술자리를 마친 김 과장은 담당 부하 영업사원, 거래처 부장 및 사원과 함께 강남역 근처 한 룸살롱을 찾았다.

룸 안으로 들어선 김 과장은 웨이터에게 기본 술상과 함께 인원수에 맞게 4명의 접대부를 청했다.

잠시 후 국산 양주 몇 병과 함께 맥주와 안주가 들어왔고, 이어서 정장 차림의 20대 여자들이 들어왔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각자의 곁에 앉은 여자들이 술을 따르기 시작했고, 맥주에 양주를 섞는 일명 '폭탄주'가 한잔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접대부는 맥주 잔에 양주잔을 넣은 후 휴지로 컵 윗면을 막은 후 흔든 일명 '회오리 주'를 만드느라 부산했다.

연거푸 3잔의 폭탄주를 마시는 김 과장을 보며, 나머지 사람들은 함성과 함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거래처의 부장이라는 사람은 "역시, 김 과장은 폭탄주 체질인 것 같아"라며 김 과장을 추켜세웠다. 이에 질세라 담당 부하 직원도 "남자라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마셔야죠"라며 폭탄주를 들이켰다.

부하직원은 맥주 잔에 젓가락 두 개를 걸치고 그 위에 양주잔을 놓은 다음 테이블에다 머리를 박으며 '충성' 을 외쳤다. 일명 '충성주'를 마신 것인데, 맥주 잔에 양주잔이 떨어지지 않자 옆에 앉아 있던 접대부들은 "충성이 부족하다"고 소리쳤고, 부하직원은 벌주로 양주 2잔을 연거푸 마셔야만 했다.

폭탄주가 계속해서 돌아가자 화장실로 자리를 피한 김 과장은 "좋아서 폭탄주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며 "회식자리고 거래처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것이다"고 말했다.

접대부들과 노래도 부르고 뒤엉켜서 춤도 추고, 거하게 2차를 마친 김 과장과 일행은 11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3차를 가자며 접대부들과 나와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회식자리, 성희롱으로 이어져

모 자동차 영업소에 근무하는 김모(28·여) 씨는 첫 출근한 회사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신입사원 환영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신 담당과장이 2차 장소인 나이트클럽에서 김 씨를 옆자리에 앉히고, 술을 따르라고 했다는 것.

"상사인 과장이 술이 취해서 옆자리로 끌고 와서는 술을 따르라고 강요했어요. 그게 싫어서 옆에 있는 남자 동료들에게 도움의 시선을 보냈지만, 다들 외면하더군요."
수치심까지 느낀 김 씨는 울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음날 출근한 김 씨는 과장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으며, 결국 1주일 후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이처럼 2차를 강요하는 기업 내 회식문화에 피해를 입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직도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다.

서울 여성의 전화가 상반기 직장내 성폭력 실태를 분석한 결과 28.27%가 회식자리에서 발생했다.

모 무역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이모(25·여) 씨는 지난해 잊지 못할 아픔을 당해야만 했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이씨는 같은 부서 부장의 강요로 인해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회식에 참가해야만 했다.

회식자리에서 못 먹는 술을 마셔야 했고, 2차로 노래방까지 따라가서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한다.

이씨는 "부장님이 데리고 가서 술을 먹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다"면서 "2차로 들른 노래방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춤을 추라는 부장의 말에 너무 황당하고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2차까지 이어지는 우리 내 회식자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성희롱 문제다.

주로 친근감을 표시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은 여성 직장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준다.

술을 마셨다는 핑계로 손을 잡거나, 2차 자리에서 옆자리에서 술을 따르게 하는 등의 행태는 많은 기업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회사 생활이 불편해질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이씨는 "친하다는 이유로 손을 만지거나 은근히 무릎을 쓰다듬는 등의 행동을 하는 직장상사가 있다"면서 "불쾌감을 참을 수 없어 그 자리를 피하지만, 나중에는 회사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진다"고 털어놨다.

서울 여성의전화 관계자는 "회식자리에서도 성희롱 사건이 많이 발생된다"면서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강화해 이런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술 권하지 말아야

과천에 사는 정모(30·여) 씨는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몸이 아팠는데도 직장 상사가 따라주는 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면서 "결국 술을 먹고 쓰러져서 병원까지 실려간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다.

정 씨는 "직장 회식도 식사와 함께 가벼운 술자리로 1차에 끝났으면 한다"면서 "부득이하게 술자리를 가져도 제발 좀 주량에 맞게 마시고, 술을 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말을 앞두고 직장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과도한 음주문화, 회식문화에 대해 여성부는 적극적인 개선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음주 및 회식 문화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중이며, 결과를 분석해 우리 사회 전반의 회식 및 음주문화 실태를 파악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해 강요 없는 술자리, 절제하는 회식문화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확산시키기로 했다.

여성부 관계자는 "올 연말에도 과도한 음주문화가 판을 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특히 직장내 회식자리에서 음주와 함께 성희롱이 만연하고 있어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 홍보에 나설 계획이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우먼타임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우먼타임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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