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시대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로 보건대

등록 2001.12.09 23:50수정 2001.12.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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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예상과 달리 미국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물론 미국은, 그들 자신은 하늘 위에서 공중폭격만 행하고 아프간 반군들로 하여금 대리전쟁을 치르게 한 비겁의 대가를 다시 한 번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일단 이겼다. 그들의 승리는 학살을 낳았다.


반대로 탈레반이 저항에 성공했거나 적어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미국이 제2의 베트남전을 치르는 국면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경우 미군도 미군이지만 정작 고통을 당하는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었을 것이다. 혹한의 기아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면서, 그들은 1400년 전의 율법을 더욱 더 훌륭하게 지킬 것을 강요받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비상시국은 탈레반의 야만적인 통치에 점점 더 큰 정당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탈레반의 원리주의란 결국 또 하나의 반달리즘 아닌가. 국민들은 텔레비전과 영화를 볼 수 없다. 인터넷 역시 금지된다. 여자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고 직업도 가질 수 없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을 뒤집어쓰지 않고는 외출도 할 수 없다. 도둑질을 하면 사지를 절단하고 술을 마시면 태형을 가하고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인다. 이교도의 유적은 그 아무리 인류적 문화유산일지라도 파괴당할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런 사상을 반달리즘이라 규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그들의 가치관이 있는 법이라고 문화의 상대성만을 강조할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반달리즘에 빠진 종교권력(탈레반)에 대한 독단적인 '십자군'(미국)의 전쟁이었다. 그 누가 이기더라도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는 희망이란 애초부터 기대할 바가 없었다. 반군들, 파슈툰 부족장들, 쫓겨난 국왕이 한 자리에 앉아 다국적군을 보호자로 모신 정권을 세운다 한들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이상적인 방책은 될 수 없다.

어느 민족, 국가에게나 최선은 커녕 차선의 방책도 허용되지 않는 역사적 시기가 있다. 그대로 있어도(탈레반의 통치) 상황이 바뀌어도(미국의 승리) 과거로 회귀해도(구권력의 복귀) 희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상황을 선택할 힘은 없다. 역사의 무자비한 전개 앞에 무력한 그들은 다만 그 더러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같은 수렁 속에서 과연 누가 더 옳을 수 있는가? 탈레반과 빈 라덴인가? 돌아온 국왕인가? 소수파 북부동맹인가? 파슈툰의 족장들인가? 미국인가? 영국인가? 프랑스와 독일과 일본인가?


한 나라의 역사에는 어떤 주체적 선택도 어떤 올바름도 있을 수 없는 절망과 맹목의 시대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런 시대에 그 나라는 주체적 선택과 올바름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야만이 지배하고 야만에 적응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나쁜 꿈처럼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적응한 자들 가운데 우연히 다행스럽게도 야만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그 힘은 보잘 것 없어 역사는 여전히 비극과 우여곡절로 점철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 희미한 꽃이 피어난다.

또는 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그런 시간이 도래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 연약한 반도의 나라에서와 한 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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