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은 그토록 심오하고 잔인한 것인가?

책 속의 노년(15) : 산도르 마라이 <열정>

등록 2001.12.10 10:31수정 2001.12.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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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의 노인 헨릭과 콘라드. 사관학교에서 열 살 때 만나 24년 동안 자궁 속의 일란성 쌍둥이처럼 붙어지낸 친구 사이이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 밤 마주앉은 것은 41년 만의 일이다.

귀족 출신의 헨릭과 하급 관리 집안의 아들인 콘라드. 그들은 가까웠지만 서로 다른 기질과 삶의 리듬을 가진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사랑에 빠진 콘라드. 콘라드는 헨릭을 죽이려 하지만 죽이지 못하고 먼 열대의 나라로 떠나버린다.

10대와 20대, 30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형제보다 가까이 지낸 친구와 아내의 사랑, 헨릭은 아내를 향한 마음에 빗장을 걸고 침묵과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둔다.

남편 친구와의 사랑, 그 사랑은 말 한 마디 남기지 않은 채 떠나고 남편은 자신에게 완전한 침묵과 외면으로 담을 두른다. 8년 후 크리스티나는 죽음으로 두 사람에게 답을 남긴다.

친구와 아내의 배신으로 삶과 세상의 길을 잃어버린 헨릭. 그는 기다린다. 언젠가는 콘라드가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린다. 그리고 오늘 밤 두 노인은 41년만에 마주앉았다.

예전처럼 앉아 식사를 마친 두 사람. 콘라드가 돌아온 것이 바로 자신의 복수라는 헨릭의 이야기에 콘라드는 거의 대답이 없고, 소설은 마치 헨릭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하면서도, 헨릭의 가슴 속에는 41년 동안의 침묵과 고독 속에서 길어올린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과 인생의 무수한 갈래들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헨릭은 묻는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한 사람은 피해서 도망가고, 또 한 사람은 고통으로 문 닫아걸고, 마지막 한 사람은 그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어쩌면 헨릭은 사건의 진실보다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인간의 본성은 이런 일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사랑과 우정과 운명은 또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찾고 또 찾느라 침묵과 고독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살면서 맺고 있는 이 많은 관계 속에서 과연 몇십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기다림을 골라낼 수 있을까.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중요한 일은 저절로 알 수 있는 법이라는 말과 함께, 두 노인이 마주앉은 밤은 새벽으로 바뀌고 그들은 이제 헤어진다.

책 사이 사이에 담긴 노인 특유의 솔직함과 담담함으로 풀어놓는 노년에 관한 헨릭의 통찰은, 작가 나이 42세에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깊다.

…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며, 늘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실제로 원하는 것은 항상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나이가 들어 죽음을 코앞에 두었다는 뜻이다 … 인생의 모든 화복을 알고,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고, 좋든 나쁘든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는, 그것이 노년이라네 …

(열정 Die Glut,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솔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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