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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의 긴급조치 발동에도 불구하고 그해 3월 1일에는 '명동성당 구국기도회' 사건이 터지고, 이에 더욱 크게 위기감을 갖게 된 박정희는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하면서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터뜨리게 됩니다.
<민주청년학생연합회>의 약칭인 민청학련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2차 인혁당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던 것인데,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은 공산주의자의 불순한 책동에 의한 것으로 조작되기 시작했고, 또 이때부터 수많은 '관제 공산주의자'들이 시국 사건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지상에 발표되고 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서 김지하 시인의 구속에 이어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구속, 천주교 사제들의 단체 활동 표발과 명동성당 기도회, 7월 25일 김수환 추기경의 명동 성당 기도회 강론, <민주회복 국민회의> 발족 등이 이어지면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정부의 노골적이고 포악한 탄압에 의해 더 더욱 확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신정권의 민주화 운동 탄압과 궤를 같이하는 언론 통제는 동아일보의 대다수 기자들과 조선일보의 일부 기자들에게 큰 각성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동아일보 기자들은 10월 24일 마침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사에 있어서 찬연히 빛나는 금자탑을 쌓은 거지요.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과, 민주인사 50여 명이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가진 '민주회복 국민선언대회' 상황을 11월 27일자 1면 머릿기사로 크게 보도하는 등의 그 실제적 행동은 곧바로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을 불러오고 맙니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사상 유례없는, 전무후무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가 드디어 동아일보의 목을 조이기 시작한 거지요.
당시 동아일보 구독자였던 나는 어느 날부터 (정확하게는 12월 16일부터) 갑자기 동아일보의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아연한 느낌이었으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면서 '의분(義憤)'에 젖게 되었지요. 동아일보 광고주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한꺼번에 광고예약을 취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실은 그 '이유'가 너무도 뻔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의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내 가슴에 가득 끓어올랐던 그때의 그것이 '의로운 분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슴 의분만을 품었을 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의분이 크면 클수록 국민으로서의 무력감만 덩달아 커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는 또 곧바로 독자들에 의한 '격려 광고'라는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초유의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아일보의 광고면에 한 독자(계훈제 선생)의 성금에 의한 광고, 동아일보를 '격려'한다는 뜻의 광고가 게재되자, 또 곧바로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줄을 이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언론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참으로 보배롭고도 의미 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에 독자들의 격려 광고는 연일 쇄도하였고, 동아일보의 모든 광고면은 수많은 독자들의 갖가지 언어 형태의 격려 광고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숲'처럼 장식되었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동아일보의 광고면을 보는 재미가 참으로 각별하였습니다. 기사면의 기사들보다도 광고면의 격려 광고들을 읽는 일에 더욱 열중하곤 했지요. 그리고 수많은 격려 광고들을 읽으면서 의분의 피가 더욱 뜨겁게 용솟음치는 나 자신을 느끼곤 했지요.
그러나 나는 하고 있는 사업이 별로 신통치 않은 데다가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일이 급선무여서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내는 일에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밀렸던 신문 구독료를 합산해서 12월분까지 깨끗이 완납을 했지요. 이것은 나의 확실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이미 또 다시 신춘문예에 도전을 한 나는 만약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을 해서 상금을 타게 되면 그 상금의 절반을 뚝 잘라서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내겠다는 생각도 했답니다. 세월은 어느새 또 한차례 신춘문예 시즌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때였고, 동아일보 역시 광고탄압의 와중에서도 신춘문예 행사를 끝까지 치를 눈치였습니다.
나는 소설 원고가 이미 진작에 내 손을 떠난 상황임에도 상금을 타서 동아일보를 도울 생각을 하니 더욱 비장해지는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번에는 기필코 신춘문예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어기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소설을 써서 또 한번 도전했던 1975년도 신춘문예에 어려 있는 각별한 사연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답니다. 나로서는 참으로 각별한 것일 수밖에 없는 그 '사연'을 잠시 소개하고 싶군요.
1980년대 초에 내가 만들고 키운 충남 서산·태안의 문학지 <흙빛문학> 제15집(1991년 하반기호)은 '창립 10주년 기념호'이기도 했지요. 앞부분에 '창립회원특집'이라는 것을 꾸몄는데, 나는 거기에 '자전 에세이' '10년 세월의 마루턱에서'라는 글을 썼지요. 그 글의 한 부분을 여기에 옮겨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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