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에서 바라본 우리들의 삶

2박 3일간의 덕유산 기행기

등록 2002.01.02 15:54수정 2002.01.0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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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기상청에서 발표한 일기예보가 이제는 들어맞는다 싶었습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싸락눈이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서울 시내의 전경을 뒤로 한 채 버스는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고, 저의 마음 또한 여느 여행객처럼 새로운 곳으로의 동경과 마음의 여유를 찾아간다는 느낌이 새록새록 가슴 속 한 구석에서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어느덧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진입하여, 목적지인 거창 시외버스터미널에 다다랐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과 함께 덕유산 자락으로 입성하기 위해 차에 몸을 실었죠.

거창 시내를 벗어나 덕유산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자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렸고, 시나브로 2년 전 제가 이곳을 찾았을 때 덕유산의 설경(雪景)이 기억 속에 떠올랐습니다.

덕유산 어귀의 정경은 그야말로 '순수'와 '평화' 자체였고, 세상 그 누구도 그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습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핸들을 잡은 권 씨 아저씨(서울. 56세)는 혀를 차며, "망할 또 한바탕 눈이군"이라고 말합니다. 젊은 시절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기업을 경영하며 삶이 지칠 대로 지친 그가 이곳 덕유산 자락에 정착을 한 이유는 단 한가지 '건강'입니다.

권 씨는 시종일관 입을 다물지 못하며 함께 온 일행에게 그 동안 이곳 덕유산의 소식을 전하며 "그대로야"라는 말로 2년 동안 이곳의 변화된 모습을 한마디로 일축합니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겠지만, 이곳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항상 일정하지요. 단 사람들이 각종 개발을 명목으로 러브호텔과 음식점이 난립하여 수려한 덕유산 자연경관을 망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화롭고 아름다움 그 자체인 곳이 바로 이곳 '덕유산'인 것입니다.


봄, 그야말로 개나리의 만개로 온 산이 노랗게 물듭니다. 이럴 때면 계곡에서 동면을 취하던 너구리, 뱀, 산 멧돼지 등이 기지개를 펴고, 꽁꽁 얼어붙은 계곡물은 녹아 덕유산 정상의 작은 냇가에서 이곳 상류 계곡까지 흘러들어 말 그대로 겨울과 봄 사이 계절의 변화 과정을 꾸밈없이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여름 또한 마찬가지죠. 봄의 온기를 받아, 신록으로 물든 덕유산은 매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로 온산을 뒤덮습니다. 덕유산의 여름은 특히 월성 계곡의 한기가 한 여름의 무더위를 사그리 녹여낼 만큼 속세에서 지친 우리네 심신의 원기를 회복시켜줍니다.


가을은 말 그대로 색(色)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이웃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단풍도 비등하지만, 이곳 덕유산의 단풍은 보통 산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산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납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할 때 발산하는 '피톤치드'라는 화학물질이 단풍을 구경나온 사람들의 후각과 더불어 붉게 물든 단풍의 정경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이지요.

둘째 날

2년만에 찾은 이곳 덕유산은 제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1999년 때의 겨울의 그것과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이미 20mm의 눈이 덮여 무릎까지 차오른 이곳 덕유산 곳곳은 그야말로 하얀 세상입니다.

언덕 너머 산의 정상 봉오리는 이미 눈으로 덧칠 되었고, 숙소를 제외하고, 주변 덕유산 계곡의 물소리가 간혹 이곳 하얀 세상의 고요함을 일깨웁니다.

덕유산 정상 400m에 위치한 이곳 속소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사무실 공간에서 장기간 컴퓨터에 앉아 복잡한 사고와 구상을 하는 터에 지칠 대로 지친 오늘날 현대인의 영혼을 일깨우기에 충분할 듯 보입니다.

사실, 지난 2001년은 저를 포함한 한국인 모두가 너무나 많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게 사실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간에 벌어지는 각종 외교적 갈등, 일본 준이치로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와 이에 따른 한일 양국의 갈등심화, 미국의 9.11 테러사건, 중국의 WTO가입,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체코 프라하와 시애틀 등에 모인 수천 수만의 민중들의 함성 등 연일 우리의 정신을 혼돈과 충격으로 잠재우기에 충분한 사건들이 발생했지요.

또 국내에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였다며 각종 소비문화가 붐을 이루고, 중산층의 몰락과 도시빈민의 수의 급격한 증가, 고용불안 고조, 남북 이산 가족 상봉 좌절에 따른 80대 실향노인의 자살 사건 등 우리를 우울하고 슬프게 만드는 사건이 연일 벌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속세의 카오스(chaos)가 이곳 덕유산의 자연질서와 관계가 없다고 보는가?"라며 저는 연신 자신에게 되묻습니다. 이곳 덕유산의 계곡, 나무 그리고 생물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도 속세의 이 같은 비극과 충격을 느끼지 못하리라 보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모르는 것이죠. 우리들의 이기(利己)가 순수하고 깨끗한 이곳의 생명들을 파멸로 만드는 것을, 그렇지만, 이들 생물들은 애써 모른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이 자연의 생물들을 사냥감으로, 포획의 대상으로, 욕망의 표적으로 삼는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작태가 이들 덕유산의 생물들을 멍들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까요?

영하 10도의 한겨울 날씨, 주변은 온통 눈으로 다시 덧쌓이고, 간밤에 또 다시 눈서리가 호되게 왔습니다. 주변은 모두 꽁꽁 얼었습니다. 계곡으로 가보았습니다. 계곡 가는 길로 향하면서 나란 존재에 대해서 문득 의문을 가져보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고, 또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내가 갈 길은 어디이고, 나 아닌 타인과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참다운 삶인가?" 머리 속 깊숙이 숨을 들이키며 정답 없는 물음을 계속 던져보았습니다.

계곡의 물이 꽁꽁 얼었습니다. 계곡 끝자락에 곳곳이 박힌 고드름이 밤새의 추위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년 전 여름에 이곳 계곡의 물줄기가 지금의 그것이 아닌 것처럼, 물은 위에서 아래로 쉼 없이 계속 흐르기 마련이고, 이것이 세상의 순리요, 자연의 법칙인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저마다 희망을 밝히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돌아가고픈 자연이 희생과 유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면 자연은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에 오면 자연에 맞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비운다는 것,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면서 가식 없이 순수한 자연의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문득 자문자답해봅니다.

마지막 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법. 그것이 인간사의 이치입니다. 이왕 자연의 세계로 돌아온 이상 사회의 구속을 받기는 죽기만큼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애초 이번 기행을 하기 전에 다른 일을 고려해서 미리 일정을 잡아놓은 행위 자체가 곧 자연이 보여주는 '자유', '평화', '순수'라는 특성에 비춰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닌지 반문해봅니다.

덕유산 아래의 세상은 이곳 덕유산에서 보여주는 자연의 이치와는 대조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짧지만 2박 3일 동안 이곳 거창 덕유산에서 깨달은 자연의 순수함을 잊지 않을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하면서, 덕유산과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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