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 한 벌로 세 계절을 산 사람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1.05 18:58수정 2002.01.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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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이고 추운 겨울이라고 동면하는 곰처럼 뒹굴며 지내다 송명호라는 선배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실은 12월에 전화 통화하면서 연말이나 연초 쯤이면 책이 나올 거라는 말을 들은 때문이었다.

책이라 함은 <예기집설(禮記集說)>이라는 중국 고대의 경전 가운데 하나로 전부 50만자나 되는 한서(漢書)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었다. 두꺼운 책 다섯 권 분량 가운데 이번에 나온 것은 그 첫번째 권이다.


밤 늦게 만나 그가 몇 년 고생 끝에 간행한 번역책을 건네 받으니 감회가 새로워 몇 자 남기지 않을 수 없겠다.

실은 그와 나는 대학 동기인데 그의 나이는 나보다 열세 살이 많다. 경북 경산 사람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춘기를 방황으로 보낸 탓에 손목에는 칼을 댔던 흔적이 남아 있고. 피부는 천생으로 농군보다 새까만데다 튀어나온 이마 밑에 움푹 들어간 검은 눈이 집념으로 빛난다.

일찍이 시청 9급 공무원으로 철거반원 생활을 하면서 서민의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하기도 했음을 나는 들었다. 고학으로 늦은 나이에 처음 들어간 대학이 서울 시립대학교였고 나와 함께 다닌 대학은 그 다음에 다시 공부해서 온 것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당연히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여학생들이 동기인 그를 전부 철없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늘 외톨이였고 굶주리고 갈급한 눈빛을 버리지 못했고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인상을 풍겼다. 다른 동기생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그들은 그 진의를 오해하곤 했다.

그 시절의 그에 관한 기억으로 가장 뚜렷한 것은 그가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단 한 벌의 누런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매에 시커먼 때가 묻은 그 싸구려 외투를 나는 지금도 선연히 기억한다. 그때 그는 용산역 앞에서 감자 따위를 떼어다 팔아서 학비를 댄다고 말했는데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대학교 2학년 때인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집에 찾아가니 좁디나 좁은 방에 눈에 띄는 건 커다란 책상 하나뿐이었다. 어쩌다 부부 사이에 다툼이 일면 내 자취방에 와서 하룻밤을 의탁하곤 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마땅히 취직할 자리가 없었다. 나이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진주에 내려가 학원 선생하겠다던 전화 목소리가 지금도 귀를 울리는 듯하다. 모아놓은 게 없었으니 이사하기는 간편했겠다.


몇 년 세월이 흘러 서울로 올라온 그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로써 그가 얻은 것은 아파트 한 채와 소백산 자락의 은거지와 선릉 역 앞의 서당 겸 연구실 하나. 훨씬 더 많이 벌 수도 있었고 큰 재산 모을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그는 서당을 만들어 스스로 한문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학생들을 모아 강의를 했고 대만에서 중국 청나라 건륭제때 집대성된, 값비싼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사들여 서당에 보관했고, 앞에서 말한 그 경전을 번역하는데 시간과 공을 들였고, 스스로 출판사를 만들고 직원을 두어 직접 번역본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그는 아이가 둘 생겼고 머리가 벗어졌고 술이 약해졌다.

책을 건네면서 그는 오타가 많아 이번에 간행된 1000권을 모두 버리더라도 새로 인쇄를 할 요량이라고 했다. 누가 들으면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말로 번역된 적이 없는 경서를 오점 없이 완벽하게 간행, 보관하겠다는 그의 진의를 나는 믿는다. 실로 감당할 수만 있다면 책이라는 정신문화를 위해 바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 세월 동안 나는 그에게 150만 원과 그밖의 물질적 원조를 얻었으나 이는 내가 그에게 얻은 정신적 양분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언제나 지식과 정신을 추구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펴낸 두 권의 시집 때문이 아니더라도 삶 자체가 시인이다. 내 인생의 행로가 바뀌려 하는 이 겨울에 내 그를 따르고 교분을 놓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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