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형제 종교간의 역사적 갈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종교들이다. 그러나 이 형제종교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갈등과 반목, 억압과 저항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서로를 왜곡했고, 그것이 이들 사이의 갈등을 더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왜곡은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부터 더 악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이 단순히 태도나 세계관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반(反)유대주의는 신약성서 자체에서부터 시작되어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홀로코스트'(유태인대량학살)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대량학살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미국의 페르시아만 전쟁, 아프카니스탄 폭격에 이르기까지 반이슬람주의는 왜곡과 더러운 전쟁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적 서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코르푸스 크리스티아눔'(Corpus Christianum) 시대가 지난 후에도 그리스도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이슬람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유대교와의 대화에 무거운 부담을 갖는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독일 신학자만이 아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신학자들도 선뜻 발언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 못지 않게 신학적으로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지난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대한 태도는 훨씬 더 적대적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선교의 마지막 적대세력으로 간주한다. 두 종교가 모두 배타적인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이슬람의 공격적인 팽창도 갈등의 심화에 기여했다.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도시의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뀐데서 절정에 이른 일련의 군사적 패배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1529년 비엔나를 포위하기까지 했고, 마침내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은 적대감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와 성서해석
그리스도교의 이른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의 인종차별주의적 반유대주의에서 정점을 이루었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성서로까지 소급된다. 주목할 것은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살이 미치광이 같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끔찍한 범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히틀러가 처음 의도한 것은 강제이주였지 몰살까지는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유대인 정책을 종족 말살로 돌변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나라도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나치는 서방 강대국들이 유대인 이주에 협조적이지 않으며 그 누구도 유대인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방조했다는 최소한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방 국가들의 방조는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가 서구 문명의 주변부가 아니라, 그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 그 뿌리가 훨씬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와의 적대적 관계는 성서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왕국에서 그 약속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시작된 두 종교의 갈등은 콘스탄틴 대제의 그리스도교의 국교화에서 제도화되었다. 박해받던 카타콤의 관용적인 종교가 배타적인 종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데오도시우스 1세(378-395)가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교도들과 이단의 신앙과 관습은 불법적인것이 되었고, 그들의 사원과 교회는 파괴되었거나 몰수당했다. 테오도시우스가 만든 법전은 유대인의 법적 신분을 강하게 억압했고, 뒤이어 중세까지 발전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관점의 기초를 놓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 신화는 마침내 사회적으로 결합되어 독일 나치에 의한 인종말살적 반유대주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갈등과 역사적 경위
이슬람은 그리스도교가 대적해야 했던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로부터 가장 심하게 왜곡되고 비난받은 종교일 것이다. 천 년 이상을 그리스도교와 서구문명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이슬람에 대한 왜곡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마호메트'로 부른데서 드러난다.'무함마드'에 해당하는 스코틀랜드어 '머하운드'가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그를 의도적으로 마호메트로 부른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함마드는 우상숭배를 철두철미 배격했고 스스로를 하느님의 시종이며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고 했는데도 마치 그가 스스로를 최고의 신으로 여긴 것처럼 왜곡했던 것이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은 출발부터 강력하게 주장한 유일신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 때문에 유대교 혹은 그리스도교의 일파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은 두 종교의 신학에서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예수가 무함마드 이전 시대에 마지막으로 부름받은 위대한 예언자이자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결코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로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을 모르는 이슬람은 대속(代贖)의 필요성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두 종교의 신학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16∼17세기 유럽에서는 지독하게 반이슬람적인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끝없는 증오는 동유럽에 대한 터키의 정치적, 군사적 압력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이슬람에 대한 왜곡은 당시 그리스도교 서구의 열등감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수학, 화학 등 과학분야에서는 물론 문학과 예술 면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서방세계의 모델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슬람이 지배하던 세계를 동양(Orient)으로 표현한 것도 그들의 동양 지향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라는 말에 함축된 '새로운 사조나 문화에 대한 적응'이라는 의미도 이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타종교에 대하여 이슬람이 더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이야기도 사실 역사적 근거가 없다. 이슬람은 오히려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틴노플을 정복하여 이스탄불로 개칭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을 종교적 코스모폴리탄 도시로 만들려고 했고, 패전국의 그리스도교 문화까지도 관대하게 수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스탄불에 지금까지도 그리스 정교회 본부가 존속되고 있다는 점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슬람과 유대교, 혹은 그리스도교의 적대적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918년 오스만 제국의 패전에 따른 전후문제 처리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들과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 후 냉전체제 아래서 강화된 서방의 친 이스라엘 정책이 결국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과 그리스도교 서구 국가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정치적 문제의 종교적 왜곡 해석은 지양해야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이슬람 사이의 갈등은 신학적, 종교적 원인에 의해서만 유발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원인에 의한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불교나 힌두교 등 전적으로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보다 이들 세 종교들 사이의 갈등과 적대감이 더 심한 것은 이들이 어쩌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들 종교들 사이의 갈등구조를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갈등과 억압과 저항의 역사에 의해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것, 그리고 다른 종교를 그 자체로서 정확하게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대화의 전제인 것이다. 그래야 우월감이나 피해의식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이슬람국가들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문명충돌론'이나 선과 악이 대결하는 '성전'으로 왜곡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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