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이 다 되신 내 노모님의 바람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우리집의 새 아기예수상

등록 2002.01.07 11:13수정 2002.01.0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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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전에 쓴 글입니다만, 다분히 종교적인 내용의 글이어서 발표를 주저해 왔습니다. 하지만 종교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나의 '참된 세상 꿈꾸기'에 부합할 수 있는 글이고, 또 그것을 수긍하시는 분들께는 참고가 될 수 있는 얘기일 것 같아서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 있으시기를 빕니다.

우리 집엔 성물(聖物)이 꽤 많은 편입니다. 방벽과 거실 벽 등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고상(十字苦像)과 대형 묵주와 성화(聖畵)들이 걸려 있고, 집안 요소 요소에 갖가지 크고 작은 성상(聖像)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일 터이지만, 그 성물들 속에는 우리 가족의 신앙심의 농도 같은 것이 잘 함유되어 있을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우리 집의 종교적 분위기는 매우 실팍한 편일 듯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고상을 제외하고, 성화와 성상들은 구입을 한 것들일 경우 하나같이 내 어머니의 심미안과 정성이 스며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교회 행사 등에서 당첨되어 받은 것도 있고, 딸아이가 야외 미사(소풍) 날 교리 퀴즈에서 일등을 하여 타온 것도 있지만, 대개는 내 어머니께서 구입하신 것들이고, 걸려 있거나 놓여 있는 위치까지도 어머니의 의지가 발휘되어 있는 것들이지요.

우선은 어머니의 신심의 작용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지만, 거의 모든 성물마다 어머니의 심미안―미적 감각이 어려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좀더 신비롭고도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도 남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끔 성물을 구입하시는 어머니는 성화나 성상의 경우에는 그 '형상'의 의미―성서상의 사건이나 교회의 역사적 사건 등과 관련하는 메시지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 성물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일단은 그 성물의 아름다움에 끌린 탓이지요. 성물의 아름다움에 끌린 나머지 그 형상의 의미나 메시지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고, 드디어 선택을 결정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 집에 최근 새 성물 하나가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아기예수상이지요. 그런데 이 아기예수상은 어머니께서 구입하신 것이 아니랍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성물이지요.

우리 집 거실의 텔레비전 위에 자리잡게 된 이 새 아기예수상은 참으로 볼수록 아름답습니다. 5, 60cm 정도 크기로 만들어진 입상(立像)인데, 그냥 전체가 석고나 플라스틱이나 고무로만 만들어진 게 아니랍니다. 별도로 만들어진 화려한 면류관을 쓰고, 하얀 드레스와 푸른 망토를 입고 있는 상이지요. 또 오른손의 쳐들어진 두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것은 내 짐작에 신성과 인성을 의미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왼손에는 십자가가 달린 둥근 물체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지구―이 세상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얼굴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 얼굴인데, 예수님의 어렸을 적 모습임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볼수록 예쁘고 착하게 생긴 얼굴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 같은데, 우선은 플라스틱을 자료로 한 그 조형미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델로 삼은 그림이라도 있다면 그 그림을 그린 이의 솜씨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만들어 낸 그들의 심성이나 신심에 대한 궁금증을 살풋 가져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플라스틱 제품만을 놓고 보면 그것이 개별 작품인 것은 아니고 어느 공장 같은 데서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 아기예수상이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은 개별 수공예품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면류관의 갖가지 장식들과 드레스의 목 부분, 소매 부분의 레이스를 보면 그 정교함과 섬세함이 절로 느껴지고….

이쯤에서 이 아기예수상이 우리 집의 새 성물로 모셔지게 된 연유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게는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주일학교 전례부에다가 미사 복사를 했고,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평일미사 오르간 반주를 전담하고 있는 아이지요. 주일 미사도 한 달씩 새벽미사와 저녁미사를 바꾸면서 오르간 반주를 하는데, 불평 한번 한 적이 없답니다. 그렇게 성당에 열심히 다니고 과외 한번 한 적이 없는데도 학교 공부도 곧잘 하니, 참으로 하느님 은총이 크지 싶습니다.

이 아이가 어느 날 제 엄마와 함께 성당 수녀원에 간 적이 있답니다. 수녀원에 한 시간 정도 머물며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의 일년 생활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보았답니다. 그 그림 중에 한 노인 수녀님이 손으로 일일이 옷과 레이스와 면류관을 만들어 아기예수상을 장식하는 장면이 있었답니다. 그 노인 수녀님은 연세가 아흔이 넘으신 분이라 했고….

그 장면을 감탄하며 보던 딸아이가 문득 할머니 생각을 했답니다. 지난 가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께 저 아름다운 아기예수상을 사서 선물해 드리면 할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라는 생각을 했던 거지요. 딸아이의 의중을 알아차린 엄마가 수녀님께 아기예수상의 값을 물어보니 자그마치 7만 원. 엄마가 아이한테 그만한 돈이 있느냐고 물으니, 엄마가 조금만 도와주면 살 수 있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딸아이한테 한 달 용돈을 2만 원씩밖에 주지 않습니다. 매월 1일 아침에 딸아이에게는 2만 원,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녀석에게는 1만 원씩 주는 거지요.
딸아이는 한 달 2만 원 용돈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 가수들의 노래 테이프나 한두 개 살뿐이어서 지갑 속에는 늘 돈이 남아 있는 눈치입니다. 거기다가 가끔 작은 아빠나 고모들에게서 받는 돈도 있으니….

그날 그 자리에서 수녀님께 아기예수상을 주문했는데, 딸아이가 5만 원을 내놓고 엄마가 2만 원을 보태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고도 묘한 일은, 그날의 내 딸아이로 말미암은 그 아기예수상 주문이, 연세 아흔이 넘으신 그 노인 수녀님께서 마지막으로 받으신 주문이었답니다.

그로부터 보름쯤 후 드디어 아기예수상이 도착했습니다. 성당 수녀원에서 아기예수상을 찾아서 차에 모시고 집에 와서 펼쳐 보이니, 어머니는 놀라면서도 크게 반색을 했습니다. 그 아기예수상이 우리 집에 오시게 된 연유를 알고서는 감격스러운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별도로 만들어진 면류관을 쓰고 옷까지 입고 있는 아기예수상을 그냥 알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채근에 따라 다음날 아기예수상과 어머니를 모시고 서산의 한 유리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예전부터 단골로 다니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다 일단 아기예수상을 맡기고 돌아왔다가 다음날 다시 가서 3만5천 원을 지불하고 유리 상자 속에 담긴 아기예수상을 조심스럽게 모시고 왔습니다.

아내는 아기예수상을 어머니 방에 모시고 싶어했으나, 어머니는 여러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자리에 모셔야 한다며 거실의 텔레비전 위에다 모시자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하니 거실 안이 온통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새 아기예수상 앞에서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9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기도를 마치고 났을 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기예수님께 기구를 드리는 게 지일 좋디야. 성모님께두 기구를 드리는 심이어서 좋구, 아기예수님은 숫디어서 무슨 기도나 다 잘 들어주신디야."
"숫디다는 게, 순진헤서 약지 못허구 어리숙허다는 뜻인디유."
"그래서 무슨 기도나 다 잘 들어주시는 거겄지."
"그럼, 어머니는 뭘 비셨대유?"
"나야 우리 새끼들이 예수님 맴 닮으며 크라구 기도혔지. 내가 그거 말구 뭘 더 바라겄어."

나는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디 아기예수님은 할머니들의 기도를 지일 잘 들어주신대유. 할머니들 중에서두 우리 어머니의 기도를유."
"내 기도를? 그럴라나?"
"어머니의 주보 성인이 안나 성녀님이시잖유. 안나 성녀님은 성모 마리아님의 어머니시구, 예수님의 할머니시쟎유."
"오, 그렇게 되는구먼."
그리고 어머니는 기분 좋게 큰소리로 웃으셨습니다.

그 순간 나는 우리 집의 성탄절이 새 아기예수상으로 하여 올해는 한결 흐벅지리라는 것을 흠뻑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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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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