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덕에 맏이가 된 아내여

<참된 세상 꿈꾸기> 결혼 15주년을 맞으며

등록 2002.01.10 09:39수정 2002.01.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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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월 10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입니다. 벌써 열다섯 번째 맞는…. 또 한번 세월 빠름을 절감합니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15년이 흘렀다니…. 항우 장사도 이길 수 없는 세월 속에서 나는 어느새 50대 중반이 되어버렸고, 아내도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1987년, 나는 마흔이 꽉 찬 나이에, 아내는 서른 넷의 나이로 ―서로 조금은 서두르는 본새로 한겨울의 가운데쯤에 있는 날을 택해 결혼을 했지요. 내가 주장하여 날을 그렇게 잡았던 것은,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께 '사는 낙(樂)'을 드리고 싶었고,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달의 초순경에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좀 무모했지 싶기도 합니다만….

장소는 태안 천주교회 성당. 다행히 날씨는 좋았습니다. 맑고 온화한 날씨 덕분에 지금보다 길이 훨씬 멀었던 공주에서 아침 일찍부터 달려오신 처가쪽 분들과 여러 먼 곳에서 오신 분들께 조금은 면목이 서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그로부터 15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 나름으로는 해마다 결혼 기념일을 챙겼지 싶습니다. 아내에게 제대로 변변한 선물 한 가지도 해주지 못하고 화사한 기분을 갖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한 번도 잊거나 모른 척 지나간 적은 없습니다. 호되게 언걸 먹은 죄로 생활이 하도 어수선하고 난마(亂麻) 속 같다보니, 결혼 기념일을 기억한다는 것이 오히려 사치스럽고 눈물겨웠던 적들도 많았습니다.

노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에서 결혼 기념일과 관련하여 어떤 표를 낸다는 것이 조금은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결혼 기념일에 대한 어떤 관념이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기억하고 챙기며 살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결혼일을 기억하거나 기념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억력이 아주 좋으신 편인 어머니가 자신의 결혼일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처가 쪽도 거의 마찬가지일 듯싶습니다. 나는 매년 장인 장모님의 생신일을 기억하여 직접 찾아 뵙지 못하면 전화라도 꼭 드리고 용돈도 보내 드리고 했지만, 두 분의 결혼 기념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은 기억조차 없습니다. 아내가 세심하게 여러 가지 기념일 표시를 해놓은 달력에도 장인 장모님의 결혼 기념일 표시는 없으니….

아무튼 평생을 자신의 결혼일조차 잊고 살아오신 어머니 앞에서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을 표나게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저어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 내외의 결혼 기념일을 '축복 받은 날'로 여기고 반기시는 눈치였습니다. 어쩌다 눈치라도 채시게 되면, 때로는 안쓰러운 빛으로 따뜻하게 관심을 표해주시곤 했지요.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의 한 가지라지만, 나는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심정을 지니고 삽니다. 시집쪽 붙이들의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거듭하다가 그만 수렁에 깊이 빠진 바람에 자신이 백묵 가루를 마시며 번 돈으로 옷 한 가지 사 입어보지 못하고 친정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고 살면서도 불평 한번 하지 않은 아내였습니다. 학부모들이 선물하신 케이크 한 상자라도 집에 들고 들어오는 때면 정확히 반을 갈라 뒷동 동생네 집에 보내주곤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빵을 가르는 아내를 보면서 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식구도 더 많으니께, 정확히 반으로 나누면 안 되지." 그러자 아내는 도리질을 했습니다. "형제간에는 정확히 반을 나누는 거예요" 하면서….

그런 내 아내는 없는 살림에도, 직장 생활을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푸짐하게 음식을 만들어 동생네 가족과 생질 아이들을 오게 하여 만찬을 즐기는 것을 가장 행복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연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는 어린 생질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은 큰외숙모"라고 할 정도로, 내 아내는 심성이 착하고 따뜻하고 누구에게나 살가운 사람이지요(이거, 완전히 팔불출이 되고 말았군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내는 집에 없습니다. 공주에 가 있지요. 7일부터 18일까지 '충남교육연수원'에서 새 교습 방법에 대한 연수를 받는 일 때문에…. 아내가 집에 있다면 오늘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집에 없으니 이상하게 허전한 데다가 홀로 15주년 결혼 기념일을 맞고 보니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혼자서 별로 할 일은 없을 듯싶습니다. 아내에게 전화하고 메일 보내는 일 외론…. 그러나 우리 부부가 해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있지요. 성당에 가서 '감사미사'를 지내는 일. 오늘 (매주 목요일마다) 우리 성당에서는 오전 10시 30분에 평일미사를 지내지요. 이 글을 쓰고 나서 곧 어머니와 아이들과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겁니다. 나로서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요.

이 글을 마치려 하니, 집에 없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8년 전에 지어 아내에게 선물했던 시 한 편이 불현듯 떠오르는군요. 8년 전이면 호되게 언걸 먹은 진구렁 속에 빠져서 캄캄절벽을 앞에 놓고 애면글면 눈물겹게 살던 시절이었지요. 8년 전의 그 시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며 이 글을 맺겠습니다. 너무 사사로운 얘기를 들려 드린 것을 조금은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맏이도 아니면서
남편 덕에, 남편 탓에
맏이가 된 아내여

타고난 착한 심성으로
일찍이 하느님을 만나
처녀 시절을 산 그대

순박하고 욕심 없는 눈으로
가진 것 없고
허풍선이 같기도 한 남자를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의 이야기들에 감동하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손 내밀어 반쪽이 된 그대

며느리로,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교사로, 주부로
악필 글쟁이의 비서로
바삐 사는 세월 숨이 가쁜데

바람 잘 날 없는 가지들을
힘껏 껴잡고 사는 세월이
아아, 번잡 무성 너무도 허당이 깊어
헤어나기 눈물겨운데…
그래도 하느님께 더 의지하고
감사하며 살자는 그대

서로의 실개천을 합해
큰 믿음의 시냇물을 만들어
미쁘게 살자며 살아온 세월도
벌써 7년이 되었구려

아내여, 어렵고 괴로워도
우리가 등 비빌 언덕 어딘가에 있고
이루려는 일에 오늘 게으르지 않으니
더욱 손 굳게 잡고
웃으며 삽시다, 고마운 나의 반려여.

(1994년 <새너울> 1월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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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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