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업고 찾아온 제자

강마을 중학교의 겨울 풍경

등록 2002.01.26 10:30수정 2002.01.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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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마을 중학교의 겨울은 살얼음이 잡힌 남강이 햇살에 반짝이고, 매운 강바람 앞에 서면 방학동안 물컹해진 생활에 젖은 몸과 마음이 탱탱해지는 것 같다. 겨울은 차고 매워야 겨울 답다. 교무실 창을 열고 찬 바람을 맞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아이들이 춥다고 야단이다. 이 추운날 무슨 청승이냐고?

교지 편집을 위해 문예반 학생들이 며칠 째 학교에 나오고 있다. 1학년 의리, 나실이, 미영이 그리고 2학년 유리, 인아 이렇게 모여 앉아 일년 동안 학생들이 쓴 작품을 정리하고 교정도 보고, 설문조사 한 내용도 정리하고, 학교 행사 기사문과 사진도 챙기는 등 분주하다.

교무실 창 밖으로 꽁꽁 얼어있는 논과 허허로운 들판이 심심한 표정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내내 재잘거리는 나실이는 하라고 한 일은 안하고 TV 연속극 이야기에 GOD의 누구는 어떻고 조잘댄다.

하여간 일은 되지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유리는 오후에 학원 간다고 쪼르르 가버리고, 인아는 오전에 학원 갔다가 오후에 나오고.

전교 부회장 근석이는 '후배들에게 하는 말' 쓰라고 하니 오늘 부모님과 마산에 가기로 했다면서 이 메일로 보낸단다. 참 내! 그래도 이 추운 날 나와서 고생하는 문예반 아이들이 고맙다. 남들 노는 방학 때 학교에 와서는 성질 내는 선생님 말 들으며 일을 한다.

"그래, 오늘 내가 짜장면 쏜다!"

난로 앞에 모여 앉아 아이들과 짜장면을 먹으면서 낄낄거리는데, 아기를 업은 새댁이 학교 현관문을 두드린다. 학부형이 왔다 보다 하고 얼른 나가 보니, 세상에 시집 간 제자 연주가 아이 업고 놀러 왔단다. 전화해서 내가 학교 있는 날 알았다면서, 친정 아버지 생신도 다 되고 해서 그냥 버스 타고 왔단다. 신랑은 토요일에 내려온다고.

꼭 시집 간 딸이 아이 낳아 친정 온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어쩐지 내가 할머니가 된 것 같다. 엄마가 예쁘니, 딸도 예쁘다. 낼 모레가 아기 돌이라는데 아장아장 몇 걸음씩 걷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해죽해죽 웃는 모습에 깜빡 넘어갔다. 야들야들한 돌쟁이 아기에게 입을 맞추니 연하디 연한 새 풀 향기가 난다.


조금 있으니, 교무실이 눈에 익었는지 살금살금 기어다니며 무엇인가를 만지고 놀고 있다. 덕분에 오늘 일은 접어야겠다. 아직 할 일은 많은데.

옛 선생님을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의 어린 딸을 안으며 교무실 밖 강가를 바라본다. 내 마음에 새봄이 온 것처럼 따스하다. 강 마을에 봄이 멀지 않았나 보다.


/2002년 1월 24일 목요일 쨍하게 시리고 맑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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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의령군 지정면의 전교생 삼십 명 내외의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 이선애입니다. 맑고 순수한 아이들 눈 속에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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