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 인간 사이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1.29 02:42수정 2002.01.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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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로 '디스커버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동물 다큐멘터리가 있다. 이 채널들은 우주, 지구, 생명, 인간 등 그 모든 것들을 화면에 담아내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지만 나는 그 가운데서도 동물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발 많은 것과 발 없는 것, 이것은 내가 가장 즐겨 보는 동물들이다. 지네나 전갈, 그리고 온갖 종류의 뱀들을 화면 가득 바라보다 보면 생명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코끼리는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 짐승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며칠 전 꿈속에서도 나는 코끼리를 보았다. 새끼코끼리들이었다. 빨갛게 달궈진 조개탄밭 위에서 그들은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마치 붉은 형광체처럼 안으로부터 타오르고 있었으나 나는 그들을 구해줄 수가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슬픈 꿈이었다.

집에 있을 때, 침묵하는 공간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 '디스커버리'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틀어놓고 있으면 텔레비전이 혼자 장난스러운 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런 느낌이 즐거워 텔레비전을 틀어놓고는 책을 보다 바둑을 두다 화면에 눈을 주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에 본 장면이 있다.
인간과 침팬지의 사냥을 비교해 놓은 것이었다.
사람이 사냥개를 데리고 멧돼지를 몰아잡듯이 침팬지들도 무리 지어 나무 위의 원숭이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침팬지들은 나무 위의 원숭이를 막다른 나무로 몰아넣고는 오갈 곳 없게 된 고립무원의 원숭이를 산 채로 잡아먹는 것이었다. 사람이 잡은 멧돼지를 불에 구워 먹는다면 침팬치는 원숭이의 팔, 다리를 절단하여 그냥 먹어대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나레이터가 말했다.
침팬지처럼 인간도 사냥을 하는 존재로 운명지워졌다고.
그리하여 사람은 사냥을 하고, 전쟁을 하고, 도박에 몰두한다고.

그 장면을 보기까지 나는 침팬지를 타잔의 장난꾸러기 친구로만 알았었다. 내 즐겨 본 어느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도 침팬지는 그렇게 잔인한 존재로 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침팬지는 암컷에게 힘과 지혜를 과시하기 위해 원숭이를 도륙하는 무자비한 사냥꾼, 비정한 야수였다.


또한 그렇다면 바로 인간이 그럴 것이었다. 인간은 과연 그 잔인한 영장류의 공통적 속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의 살육은 인간의 수성(獸性)을 증빙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도산, 파산, 해고와 합병이 일반화된 우리 사회의 경제적 현실도 결국은 살육자, 사냥꾼으로서의 인간적 운명 때문은 아닌가.

인간을 영장류의 공통적 속성에 비추어 설명하려는 태도가 합당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팬지의 원숭이 사냥은 인간이 동물적 속성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 보여준다. 그것은 이성적이고자 하는, 이타적이고자 하는, 결의와 의지와 인내를 통해서만 겨우 접근 가능한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사람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있는 수컷 고릴라가 사진으로 중매결혼을 하듯이 비디오 화면으로 애인을 고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화면에 등장한 여러 암컷 고릴라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것이었다.

사랑에서조차 사람은 침팬치나 고릴라로부터 별반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자기의 사람됨을 과신하면서 동물적인 일들을 저지른다. 그것이 이 현대 문명사회가 매일 행하는 일들이다. 무서운 일이다. 내 안의 수성(獸性)이 무서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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