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장남 "아버지의 친일 사죄"

[<조선> 민간법정]방재선씨 "경영진 윤리감각 미비"

등록 2002.01.30 14:55수정 2002.04.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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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0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조선일보 반민족 반통일 민간법정'에서 조문기 배심원단장(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배심원 전원은 만장일치로 조선일보에게 추호의 관용도 베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취재 : 공희정, 손병관 기자
사진 : 이종호 기자


1월30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타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역사적인 '조선일보 반민족·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이 열렸다. 약사, 교사, 자영엽, 시인, 택시기사 등 각계각층 인사 33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조선일보에 역사의 단죄를 내렸다.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방응모 조선일보 전 사장의 장남 방재선씨는 "아버지를 대신해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민주 행위를 사죄한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고, 변론 과정에서는 최민희 변호인이 "조선일보의 반통일 혐의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날 재판은 검사단과 배심원단이 좌우로 배석한 가운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고영구 변호사를 수석판사로 한 3명의 판사진이 입장하며 시작됐다.

피고인 조선일보측 인사들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고영구 수석판사는 궐석재판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피고인석에는 조선일보 신문 2부가 나란히 놓였다.

▲ 검사단 수석검사를 맡은 김인회 변호사.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안티조선운동의 또 다른 기폭제가 될 조선일보 민간법정을 시작합니다. 배심원단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고영구 수석판사는 민간법정 헌장 8조 '조선일보의 참여 보장' 1항과 2항 (조선일보나 그 대리인에게 이 법정에서 증거를 제출하고 구두 진술할 기회를 보장한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이를 포기할 경우 재판부는 직권으로 조선일보의 사정에 밝은 자 중에서 변호인단을 선정하여 그에게 변호할 기회를 보장한다)에 근거, 국선변호인 자격으로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김동민 한신대교수, 오한흥 옥천신문 편집국장 등 3명을 조선일보의 변호인단으로 선정했다.


500여 명의 방청객과 수십명의 취재진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채 진행된 이날 민간법정은 실제 법정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차분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수석검사 김인회(민변 소속 변호사) 씨가 미리 준비해온 '조선일보의 반민족·반통일 행위에 대한 기소장'을 읽어 내려갔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창간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전 민족이 떨쳐 일어났던 1919년의 3·1독립운동만세운동 후 일본 제국주의는 이전의 무자비한 무단통치를 변경하여 조선민중의 독립투쟁의식을 둔화시키고 민족해방투쟁 진영을 분열시키기 위해 문화통치라는 미명하에 조선일보의 창간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이어 변호인측의 모두 발언자로 나선 최민희 씨는 "검사단의 기소사실을 인정하지만 어떤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변론을 받을 자격이 있다"면서 "조선일보만 그런 것이 아니며 시대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행했던 것들에 대해 변론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에서 검사측은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 등에 대해 개별 기소했다.

▲김승교 검사가 '조선일보의 반민족 언론행위'에 대한 기소장을 읽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후 1시 40분 김승교 검사는 '조선일보의 반민족 언론행위'에 대한 기소장을 읽어 내려갔다.

"조선일보는 1927년 12월 17일자 사설을 통해 당시 조선 민족의 상징이었던 `백의(白衣)를 폐지하자`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등 당시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보다 더한 친일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일본 제국주의는 10년 뒤인 1937년 12월에 백의폐지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 조선일보와 사주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침략전쟁 기지화하기 위하여 `황민화 정책`을 통해 조선민중을 우롱하고 지원병과 창씨개명을 독려하고 공출과 헌금, 징용을 반강제적으로 자행하였다. 이때, 조선일보는 자발적으로 누구보다 철저하게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는 반민족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한일합방에 대해 `한일합방은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조약을 체결했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몸이 다하여 없어질 때까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던 조선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전시체제하의 물자절약 차원에서 거의 `자진 폐간`한 후 월간 조선의 전신인 <조광(朝光)>을 통해 친일행위에 가속도를 붙였다.

... 조선일보는 해방 이후 일관되게 친미사대주의로 무장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이에 기생하여 거대한 언론권력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밤의 대통령으로까지 성장하였다.

... 우리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한민족구성원 모두의 염원과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투쟁한 우리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며,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민족적 사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남한 헌법의 정신을 구체화하고 나아가 반민족행위처벌법 등 민족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선배들의 이어받아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헌장'에 기초하여 조선일보를 전 민족의 이름으로 기소한다"

한편 민간법정이 정식으로 열리기 전 사회를 맡은 추진위의 명계남 상임위원장은 이 민간법정이 서기까지의 준비과정과 몇 가지 숙지사항을 알려주었다.

"먼저 조선일보 기자는 퇴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일보를 위한 피고인석이 준비되어 있지만 앉게 할 수도 없고, 또한 조선일보측을 변호해줄 변호인이 없어 추진위에서 직권으로 조선일보를 잘 아는 분들을 국선변호사 자격으로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국선변호사들의 면면을 봤을 때 녹록치 않은 분들이 참여해 검사들이 바짝 긴장해 있다는 후문입니다."

그러나 이날 방청객속에 끼여 이날 행사를 '취재'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는 퇴정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24일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열린 '민간법정 헌장 선포 및 공개적 기소장 전달' 기자회견에도 취재진을 파견하고도 기사화하지 않았다.

정운현 씨의 방응모 친일행적 증언 / 김정훈 기자


방응모가 일본지식인에게 보낸 연하장 공개

▲증인으로 출석한 정운현씨가 1938년 2월초 방응모가 일본 지식인 덕부소봉(도쿠도미 소호)에게 보낸 신년 인사편지를 공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조선일보의 반민족 언론행위'에 대해 기소장을 낭독한 검사단은 일제시대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사례를 담은 42건의 기사를 증거물로 법정에 제출했고, 친일문제 전문기자인 오마이뉴스 정운현 편집국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양심에 따라 숨김없이 증언하겠다"고 선서한 정 씨는 먼저 조선일보의 초대 사장과 초대 발행인 예종석 등이 가입한 대정실업친목회에 대해 설명했다.

"대정실업친목회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기득권층의 친목모임으로, 사이토 총독의 문화통치에 적극 동조했다. 명칭에 들어간 '대정'은 천황의 연호를 따온 것이다. 작년 창간 특집으로 조선일보가 연재한 '조선일보 사장열전'에서 창간 주역인 1, 2, 3대 사장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조선일보가 이들의 친일행적이 거론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검사) 1933년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방응모는 평안남도 정주생으로, 금광으로 떼돈을 번 졸부였고, 이전까지는 무명인사였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제4대 조만식 사장으로부터 조선일보 인수제의를 받고, 사장에 올랐다.

그는 언론인이라기보다 기업인이었고, 자신의 기업을 키우기 위해 친일행적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위원을 지냈고, 또 다른 친일기업인 박흥식이 소유한 조선항공주식회사의 중역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잠시 폐간된 1940년 이후로는 자매지 '조광'을 통해 친일 지식인들의 글을 줄기차게 게재하는 친일행적을 펼쳤다."

정 씨는 증언 중 1938년 2월초 방응모가 이광수 등 친일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일본 지식인 덕부소봉(도쿠도미 소호)에게 보낸 신년 인사편지를 제시했다. 이 연하장은 정씨가 일본 의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입수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이날 최초로 공개됐다.

13년간 친일문제를 연구했다는 정씨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친일의 정도는 가장 강했으나 민족지라고 자처했던 조선, 동아도 1937년 3월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친일로 돌아섰다. 특히, 보도 논조만을 보면 <조선>이 친일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반대 신문에서 변호인 오한흥 옥천신문 편집국장은 "한 가지만 묻겠다. 낮술 먹었나?"고 짧게 질문하고 "안 먹었다"는 답변을 듣자 바로 신문을 끝내 장내에 폭소를 자아냈다.

▲출석하지 않은 피고 '조선일보'를 대신해 신문지가 피고인석에 자리잡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시10분경 조선일보의 '반민주 행위부분'에 대한 검사 측의 기소의견이 시작됐다.

검사로 나선 임종일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은 "기소에 앞서서 이해를 돕고자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정황을 담은 참고화면을 볼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재판장에게 요청했다.

고영구 재판장은 허락한 가운데 조선일보의 반민주 보도태도에 대한 동영상 자료가 흘러나왔고 이어 기소장이 화면을 채웠다.

"...조선일보의 반민주적 언론행위는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특히 장기집권 음모를 노골화하고 있었던 박정희의 유신정권과 광주민중항쟁을 유혈진압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 정권 때 극심하였다. 이에 본 검사단은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반민주적 언론행위를 다음과 같이 기소한다."

임종일 검사는 조선일보의 반민주 언론행위를 3선 개헌 지지, 유신헌법 옹호, 1980년 민주화의 봄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독재자 전두환 찬양-미화, 1987년 6월 항쟁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등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세 번째 검사로 나선 최규엽 민주노동당 자주통일위원장은 "조선일보의 반통일적 언론행위는 해방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특히 1980년대 냉전체제 붕괴로 한반도의 냉전과 대립구도가 화해와 협력의 구도로 바뀌어야 할 시기에도 계속됨으로써 그 폐해가 심각했다"면서 "이에 본 검사단은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반통일적 언론행위를 다음과 같이 기소한다"고 밝혔다.

(1)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2) 김일성 주석 사망설과 관련한 악의적인 보도
(3) 성혜림 망명설과 관련한 악의적인 보도
(4) 황장엽 망명과 관련한 악의적인 보도
(5) 김일성 주석 사망 및 조문논쟁과 관련한 악의적인 보도
(6) 6·15 남북정상회담 전후의 반통일적 보도
(7) 남한 정부의 대북화해정책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8) 북한의 남북대화 자세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9) 남한의 통일운동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
(10) 9.11 테러 이후 북한의 위협론을 부추기는 태도

최 검사는 "조선일보에 대하여 기소된 위 각 내용은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 헌장' 제2조 각호에 해당한다"면서 "위에 기소된 내용만으로도 조선일보의 유죄는 명맥하다"고 말했다.

방응모 씨 장남 방재선 씨의 증언 / 김정훈 기자


방응모 장남 "아버지의 친일, 진심으로 사죄"

"계초(방응모의 호)가 살아있더라도 나를 욕하지 않을 것이다. 친일과 굴종의 역사에 대해서는 적손으로서 사과한다"

▲조선일보사 방응모 전 사장의 장남 방재선 씨가 30일 열린 민간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해 아버지의 친일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후 3시50분 검찰측 마지막 증인으로 출석한 방재선(방응모의 장남)씨는 "반통일 행위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조선일보의 반민족, 반민주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방 씨는 작년 8월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 방영훈 등 방씨 일가 4인을 외환관리법, 조세법 위반 등 혐의를 들어 서울지검 특수1부에 수사를 의뢰하고, 9월에도 방일영, 방우영 씨를 상대로 한 재산상속원인무효과 호주상속 원인무효소송을 제기한 상태.

방 씨는 "1964년 3월8일 조선일보 판매부에 입사한 후 광고부, 자재부, 관리부를 거쳐 1970년 조선일보 계획관리실장 겸 코리아나호텔 건설단 관리실장을 겸임했다. 일본의 한 상사로부터 현금차관을 받아서 사업을 했는데, 자금난으로 부도가 나서 부정수표단속법으로 구속까지 됐다. 내가 조선일보 사장의 장남이어서 방일영 등이 자금 지원을 해줄 줄 알고 사업을 지속했다. 결국 한 달이 못돼서 1970년 4월7일 미국으로 갔고, 그러면서 경영권도 넘어가게 됐다"고 밝혔다.

재산권 분쟁이 걸려있는 방 씨의 특수한 신분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가 너무 감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을 의식한 방 씨는 본격적인 증언에 앞서 "한국의 가족관계상 이런 자리까지 나오게 된 내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하도 (선친이) 욕을 많이 먹어서 냉수 한 잔 먹고 해야겠다"며 긴장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방 씨는 '조선일보의 반민족 행위'에 대해 "분명한 사실은 계초 방응모 선생이 친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계시더라도 나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한다. 과정이야 어쨌든 일본에 굴종하고, 친일한 것은 변명이 필요 없다. 거듭 사과한다"고 말해 장내에서 박수가 터지기도 했다.

방 씨는 이어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야당지였던 조선일보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는 독재권력과 대대로 유착, '밤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게 됐다. 내가 고3때인 1962년에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우리 집을 찾는 것을 목격한 바 있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김영삼 씨도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과 아침식사를 하기도 했다"며 "조선일보가 바뀌면 언론이 바뀌고, 언론이 바뀌면 권언유착의 관행도 없어져 나라가 바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방 씨는 "조선의 아킬레스건은 논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진의 도덕과 윤리감각 미비에 있다. 조선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여 조선을 깨는 것보다는 경영구조를 바꿔 새로운 조선일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방 씨는 증언을 마치면서 "지금까지의 증언이 결코 잿밥만 생각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고 거듭 밝혔다.

변호인 "반통일 행위, 인정할 수 없다"

▲조선일보를 변호한 변호인단. 좌로부터 김동민 한신대 교수,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오한흥 옥천신문 편집국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후 4시 20분, 사실심리와 증거조사가 끝난 가운데 검사단의 논고가 시작됐다.

검사단은 "일본 천황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은 조선일보의 행위는 3.1운동과 3.1운동의 성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도 상치된다"면서 "조선일보는 과거의 행위는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과거의 청산 없이 미래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진 변호인단의 반론에서 눈길을 끈 것은 최민희 변호인의 '조선일보의 반통일 행위'에 대한 이의 제기. 최 변호인은 "조선일보의 보도방향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을 하자는 것으로서 통일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최 씨는 "북한을 지칭할 때, 개념상의 혼란을 정리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지칭하는 북한은 권력을 세습하고 주민들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말한다. 또한 북한이 70년대까지 대남 혁명 노선을 고수한 상황에서 북한을 '호전집단'으로 묘사한 조선일보의 기술은 올바르다"고 말했다.

최 씨는 이어 "조선일보의 통일관은 '미국-일본과의 공조 속의 통일'로, 일부 친북세력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통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변론을 마친 최 씨는 기자에게 "다른 건 몰라도 반통일은 아니다. 반민족, 반민주 행위는 명확하지만, '반통일'이라는 규정은 통일운동 진영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내려진 것 아니냐"고 말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강정구 교수의 조선일보 반통일 행적 증언 / 김정훈 기자


민간법정, "조선일보는 유죄다"

▲강정구 교수가 조선일보의 반통일 행위에 대한 증인으로 나섰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배심원 단장인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조선일보의 반민족적 반통일적 행위는 정작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면서 "배심원 전원은 만장일치로 조선일보에게 추호의 관용도 베풀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기소 내용을 보면 해방 이전 것만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조선일보는 반민족적 친일을 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벌어진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추가 기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또한 배심원단이 공통적으로 느낀 분노는 아직까지도 조선일보는 어떠한 반민족 행위에 대해 어떠한 참회나 반성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권언유착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8.15 이후 헌법에 의해 준엄한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었더니 결국 반민주 반통일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에 배심원단은 조선일보의 행위에 대해 추호의 관용도 베풀 수 없으며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으로 만장일치 합의했습니다."

배심원단은 조선일보에 '유죄'를 선고한 가운데 고 판사가 밝힌 유죄 판결이유는 다음과 같다.

"민간헌장에 근거하여 설치된 이 법정 배심원단은 피고인 조선일보에 대하여 검사단이 기소한 반민족적 언론행위, 반민주적 언론행위, 반통일적 언론행위 각 부분에 대하여 제출된 증거들에 기초하여 신중히 평의한 결과, 기소 행위사실 모두에 대하여 유죄를 평결하였다."

이어 고 판사는 "민간법정은 피고인 조선일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고 말했다.

- 유죄로 인정된 사실의 보도기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를 적시하여 사죄할 것.
- 유죄로 인정된 사실의 보도기사의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임직원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조처를 취할 것.
- 반민족적 언론행위, 반민주적 언론행위, 반통일적 언론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조선일보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편집권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


재판을 정리하면서 고 판사는 "조선일보가 민족과 역사 앞에서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참회하고 참다운 민족주의 언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사항들을 조속히 시행할 것을 권고한다"고 말했다. 오후 5시 45분 고 판사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고 조선일보 반민족 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은 폐회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덧붙이는 글 | 민간법정 재판진 및 추진위원 

판 사: 수석 판사- 고영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성유보(민주언론운동 시민연합 이사장), 
오종렬(통일연대 상임대표/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검 사: 수석 검사-김인회,조광희, 김승교 (이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임종일(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집행위원장), 최규엽(통일연대/민주노동당 자통위원장)


변호사: 최민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김동민(조선일보반대 시민연대 상임대표) 오한흥(옥천신문사 편집국장)


증 인: 방재선, 정운현(친일문제 연구가), 강정구(동국대 교수)

추진위원 : 강기갑 외 1185명

덧붙이는 글 민간법정 재판진 및 추진위원 

판 사: 수석 판사- 고영구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성유보(민주언론운동 시민연합 이사장), 
오종렬(통일연대 상임대표/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검 사: 수석 검사-김인회,조광희, 김승교 (이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임종일(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집행위원장), 최규엽(통일연대/민주노동당 자통위원장)


변호사: 최민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김동민(조선일보반대 시민연대 상임대표) 오한흥(옥천신문사 편집국장)


증 인: 방재선, 정운현(친일문제 연구가), 강정구(동국대 교수)

추진위원 : 강기갑 외 118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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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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