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른'하고 니 '얼라'하고 바꿀래?

[귀농일기] "내 마음대로 손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요"

등록 2002.01.31 15:42수정 2002.02.0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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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앞으로 매주 1차례씩 전희식(44) 씨의 '귀농 일기'를 연재합니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전 씨는 90년대 초 한국노동당 부위원장을 지냈고, 인천지역 민주노조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사무국장, 전노협 대기업특위 위원으로 활발한 노동운동을 벌인 바 있습니다.


지난 93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으로 귀농, '진짜 농사꾼'이 된 전 씨는 현재 이 지역에서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부회장, '시민행동21'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 전희식

늦게 귀가하니 큰애는 자고 있었으나 작은애는 온 방에 잡동사니 장난감들을 흩어놓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지레 먼저 방학숙제 두 가지 했다고 자랑이다. '남아 있는 숙제가 몇 배 더 많겠지, 짜식.'

"그래...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는 썼니?"
"아뇨. 그냥 개학하는 날 학교 가서 직접 말로 할려구요"
"이그~ 또 탱글탱글 노느라고 못했군. 임상옥이는 돈 좀 벌었더냐?"

MBC 드라마 <상도>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반색을 하고 손짓 몸짓으로 신이 났다.

"근데 학교 가서 말로 해도 되는 거니? 일기 안 써 가고 말이야."
"아니요..."


낮에는 두 녀석이 입을 맞추었는지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달라고 졸랐었다. 갑자기 웬 전학인가 싶었는데 자초지종을 듣고서 어이가 없었다. 방학숙제 안 해서 전학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 일기가 아니라 '월기'를 다 쓴 큰애는 부수수한 얼굴로 하루 내내 비실거렸다. 작은애는 학교 안 가고 집에서 공부하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한숨을 포옥 쉬면서 나는 한참 할 말을 못 찾았다.


ⓒ 전희식
"이놈아. 네 놈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 싶기도 하고 또 네놈이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지금 아빠 마음이 정말 갈팡질팡이다."
"아빠도 방학 끝날 때 벼락치기로 숙제 했을 것 같애요. 제가 닮으면 누굴 닮겠어요?"
"허허 이 녀석이 이제는 아빠 핑계네? 근데 만약에 너 학교 안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으냐"고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은 넙죽 잘도 한다. 아마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놈의 숙제 좀 안 내주면 안되나?' 한 달 반만에 다시 만나는 선생과 학생이 숙제검사부터 시작해야 하니 참 입맛이 쓰다.

톱으로 나무 자르기, 방에 군불 넣기, 닭장 고치기, 어린이 월간지 '생각쟁이' 보기, 자전거 타기, 만화삼국지 3권 완파, 에디슨 따라잡기라는 에듀테인먼트 CD, '굴렁쇠'라는 주간 어린이 신문 꼬박꼬박 읽었고 마당에서 야구도 많이 했고 널뛰기 연날리기 캡딱지 치기.

김영사에서 나온 '수학이 수군수군' '물리가 물렁물렁' '우주가 우왕좌왕' 등 씨리즈 다 읽었고 어린이 출판사 '비룡소'책 십 수권을 독파했다. 방구들 등에 지고 빈둥거릴 때는 또 얼마나 영혼이 살찌는 시간이었던가.

별 신통치도 않은 방학숙제를 했느냐 안 했느냐로 방학 동안의 인생을 점검받을 개학날이 나조차도 탐탁치가 않다. 애들 방학숙제가 밀린 것은 여기저기 여러 곳을 내가 데리고 다닌 것도 한몫했다.

"얘들아..."
"네..."
"너는 네가 너인 것이 좋으냐...?"

엎드려 그림숙제를 하는 아이 위에 비스듬히 기대듯 한 채 내가 물어 본 말이다.

"아뇨..."
"음... 그렇다면 아빠가 왜냐고 안 물어 볼 수가 없지. 왜 싫지?"
"어른이 아니라서요. 나 지금은 그림 그리고 싶지 않단 말예요."

하하. 숙제 없는 어른이 참 부러운가 보구나.
지난 주 생명귀농학교 동창모임이 임실군 어느 산골마을에서 있었는데 애들도 같이 갔다. 이때도 이 아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일이 있었다. 차창 너머로 눈길을 던지고 턱을 괸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그 자세로 말을 걸어왔다.

ⓒ 전희식

아들 : 아빠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해요.
나 : 응. 그래, 뭐가 그리 신기하니.
아들 : 제 손이요. 제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게 너무 신기해요.
나 : ….
아들 : 이것 보세요. 제가 마음 먹은 대로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게 참 신기하지요?
나 : 그래. 그것 정말 신기한 일이구나. 마음먹은 대로 다 움직이는구나.
아들 :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신비해요.
나 : 그러게 말이다.

아들 : 아빠! 아빠는 궁금한 거 없어요?
나 : 있지!
아들 : 그래요? 뭔데요?
나 : 응. 네가 또 무슨 엉뚱한 말을 꺼내나 궁금하지. 메롱~~
아들 : 이그~ 아빠도 참 내. 제가 궁금한 거는요.
나 : ….
아들 : 다른 사람이 저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구요. 나를 욕하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나 : ….
아들 : 칭찬이건 욕이건 다 똑 같은 '말'인데 기분은 정 반대가 되잖아요.

나 : 그러게, 정말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왜 그런 걸까?
아들 : 혹시요. 아빠, 자기 생각 때문 아닐까요?
나 : 자기 생각? 음….
아들 :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럴 거 같다는 말이에요. 물론 이것도 내 생각이지만요.
나 : 칭찬은 원래 좋은 거라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단 말이냐?

ⓒ 전희식
아들 : 네. 그런 것 같아요.
나 : 그렇다면 욕도 그것이 나쁜 거라서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다는 말이겠구나.
아들 : 그렇지요. 욕은 사실 좋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자기 모습을 알 수 있는 거니까요.
나 : 욕이건 칭찬이건 선입견 없이 들을 수 있으면 참 좋겠구나

아들 : 아빠, 저는요.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 번 생각했던 건데요.
나 : 응, 또 뭐냐?
아들 : 세상에요. 돈이 없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 : 그래?
아들 : 사람들이 가진 것을요, 돈이 없으면 돈 안 받고 서로 나누어 주면서 살지 않겠어요? 그러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 : 글쎄. 그렇게 될지 모르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네?
아들 :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들이 도둑질 안 해도 되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욕심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돈이 없으면요.
나 : 너 그러면 학교 앞 소양상회에서 과자도 맘대로 꺼내 먹을 수 있겠구나.
아들 : 네.

나 : 근데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줄 게 뭐 있냐?
아들 : 캡딱지하구요. 포켓몬스터 게임하는 기술하구요. '바람의 나라' 게임에서 진백화검하고 얼음칼도 나눠줄 수 있고요. 많지요, 뭐.
나 : 그래, 돈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더라도 가진 것을 나눠주도록 하자.
아들 : 네.

나 : 너 오늘 귀농학교 동창모임에 따라 가더니 아빠보다 더 잘 어울리다 온 것 같구나. 하는 말들이.
아들 : 하하. 제가 누굴 닮았겠어요. 저는 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나 : 뭔데?
아들 : 어른이 되고 싶어요.
나 : 얘야, 너 나랑 바꿀래? 내 어른 너 줄테니까 니 얼라 나 줄래?
아들 : 정말요? 그래요, 바꿔요.
나 : 안 물러준다, 너.
아들 : 정말예요. 안 물러줘요, 아빠.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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