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일반민족자 명단 708인에 관한 발표가 있었으니, 이는 잠복해 있던 일제하 대일협력이라는 문제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냄일 것이다. 또 지금이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임을 고려할 때 식민지 시대 대일협력이라는 문제는 앞으로 두고두고 화제가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가 한국인들에게 치욕적인 수난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그 시대에 일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그리고 근시안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조선의 미래를 일본에 맡기려 했던 이들을 단죄하는 일은 어제 하지 못했다 해서 오늘 해서는 안 될 성질의 일은 아니다. 그와 같은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찌에 부역한 프랑스인들을 전후의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처리했던가.
그러나 그 몇 십 년 동안에도 조선인들의 삶이 있어 오늘에 이어졌음을 나는 주목하고 싶다. 당대 작가의 수필 가운데 한 토막이 떠오른다. 그 글에서 그는 설렁탕이라는 별난 음식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감탄하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 또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읽은 지 오래된 글이라 제대로 다 기억나지는 않으나 요지는 그러했다.
그럴 것이다. 여름에도 그 뜨거운 설렁탕 국수가락을 후루룩 떠먹다 보면 이마며 등짝에서는 땀이 주루루 흘러내리는데 그 덕분인지 몸속은 묵은 것이 쑥 내려가고 체온이 일 도는 낮아진 것처럼 시원스럽게 되는 것이다. 겨울에는 또 어떤가. 밖에서 찬바람을 쐬고 금방 들어와 귓볼이며 콧잔등이며가 빨갛게 달아 얼얼하여도 그 희뜩희뜩 뜨거운 국물에 고추가루 몇 점 풀고 밥을 공기째로 말아 혀가 데일세라 조심조심 떠먹다 보면 어느새 온몸에 훈기가 퍼져가고 긴장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려감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설렁탕의 효능이 아니던가.
그는 또 개성의 여러 형태의 술집들에 대해서도 몇 문장 남겨 놓았으니,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팔뚝집처럼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술사발 든 팔뚝만 쑥 내미는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는 대목이다. 염상섭의 소설에도 보면 허름한 선술집이니 여급이 서비스를 하는 술집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손님들 주머니 사정 따라 형태도 방식도 가지가지인 것이 바로 음주문화이다.
요컨대, 나는 그 척박했던 시대에도 조선인, 한국인들의 삶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얘기하고 싶다. 다시 말해 한쪽에서는 굴종과 저항의 희비극적 쌍곡선이 그려지는 와중에도 살아 있었으므로, 이어받은 것이 있었으므로, 그네들의 문화는 일본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고 '조선다운' 이채를 띨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그 시대의 삶을 폭넓게 조명해 볼 수 있는 '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빌딩인데, 그 안에는 압제의 기관도 있고 투쟁의 현장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안에는 일제의 지배와 간섭에도 불구하고 왜곡과 변형을 겪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지는 '조선다운' 삶의 여러 국면들이 있다. 그리하여 먹거리도 있고, 마실 것도 있고, 소리도 있고, 키노도 있고, 소설과 시도 있는, 그런 거대한 몰의 이런저런 공간들을, 오늘의 한국인도, 금발의 서양인도,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도 함께 따라 걸으며 그 시대의 삶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공간!
나는 그런 빌딩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상만으로 그쳐야 할 비현실적인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 빌딩이 있을 수 있다면 서울은 또 하나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로써 한반도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독자독특한' 삶의 공간임을 새삼스레 깨닫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단죄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그 과거를 오늘을 위해 쓸 수 있는 또 다른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상상하는 일제시대 문화'몰'이 그에 해당하는 것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한쪽에서 역사를 추구하는 이들이 과거를 엄정히 재처리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을 때 문화를 추구하는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고민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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