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팔까?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2.19 11:01수정 2002.03.0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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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겨울의 초입이었나 싶다.
집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 커다란 관광버스가 내가 사는 동네 골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관광버스가 서교동 뒷골목에 무슨 관광할 일이 있다고? 알고보니 그 버스에 탄 손님들은 중국인들이었다. 그들은 그 뒷골목에 자리잡은 중국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마침 점심 무렵이었다.

생각해 보면 최근 몇 년 사이에 외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서울 중심 거리에서 외국인 안 만나고 돌아다니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렇다면 서울도 이제는 명실상부 국제적인 도시로 변모해 가고 있는 셈인가? 외국인 노동자들도 넘치고 일본과 중국의 관광객에 서양인들까지 가세했으니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다. 여기에 월드컵까지 치르고 나면 서울의 개방화는 더욱 급류를 타지 않을까?


연희동에 중국인 거리를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좋은 일이다. 화교들에게도 그네들의 생활을 지켜갈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월드컵을 앞두고 중국인 관광객들을 의식해서 그런 사업을 벌이는 것만으로 서울의 문화적 빈곤이 치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으로 통하는 합정동 로타리에는 길가에 축구공 모양을 한 화분이 등장했는데 볼썽사납기만 했다. 물론 공무원들의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이다. 중국인 거리나 축구공 화분이나 다 의미가 있겠으나 경복궁을 재건하는 따위의 일에는 그 성격상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월드컵 같은 인류적 축제를 계기로 중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점이지대 이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한국문화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또다른 사업을 구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 따라서 나는 한국의 문화적 상태를 문화산업의 측면에서만 보려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문화를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즉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육성하고 드러내는 일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 없이 긴요하다.

베이징의 천안문광장 옆에 붙은 한 까페에서 중국음식을 맛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곳은 중국의 유명한 근대작가인 라오사를 기념하는 곳이었다. 음식과 공연이 어우러진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교토의 정원 가진 음식점에서 일식을 맛보았을 때 내가 음미한 것은 정작 음식이 아니라 교토라는 고대적인 도시였다. 서울에도 물론 그런 곳이 있다. 그러나 인사동 같은 대중적인 거리가 오늘 보는 바와 같이 본적 모를 한정식들로 범벅이 되고 살아있는 장구 소리 하나 들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면 2002년의 서울의 개방화란 무국적화를 향한 한 걸음일 뿐이다.

월드컵은 88올림픽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화적 상태를 점검하고 그 전통의 가치를 일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무조건 우리의 옛날을 되살려놓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을 일신할 것인가를 알아야 할 때이다.


내가 비원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그곳에 가면 위대한 정적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 민속박물관, 주차장에 무슨 콘크리트 건물까지 비빔밥이 된 경복궁은 비원에 견주면 한국근대사의 천민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한 왕조가 서 있던 자리에 그 무슨 야만적인 건축들이란 말인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일제적 인식에서 우리는 더 얼마나 벗어나 있더란 말인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월드컵에서 16강에 못 들면 어떤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한국이 한국답게 인식되지 못하는 일이다. 아니, 스포츠인들에게 16강이 중요한 만큼이나 문화인들에게는 한국문화의 현상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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