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받지 않겠습니다"

정희진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읽고

등록 2002.03.12 12:22수정 2002.03.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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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한 "아내폭력" 피해여성의 편지 중에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라거나 무슨 다른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요
지난밤 그는 저를 밀어붙이고는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같았어요 정말이라고 믿을수가 없었지요
온몸이 아프고 멍투성이가 되어 아침에 깼어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에요
왜냐하면 오늘 저에게 꽃을 보냈거든요
……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바로 제 장례식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드디어 저를 죽였지요
저를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지요
제가 좀더 용기를 갖고 힘을 내서 그를 떠났더라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indian summer, 그녀가 '인간이었던' 시간

정희진은 펴내는 글에서 한편의 영화를 인용하고 있다. 인디언 썸머-.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살인범으로 몰린 여자와 변호사의 애틋한 로맨스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자가 변호사를 만나는 시점 이전의 이야기, 즉 남편과 여자의 이야기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내를 폭행한 남편과 그의 살인용의자인 여자. 남편은 매일처럼 여자에게 린치를 가한다. 욕을 하고 구타하며 여자를 가두어버린다. 거꾸로 달아놓은 문고리 덕분에 남편은 언제라도 여자를 가둘 수 있다. 남편이 여자를 때리고난 후에도 빌고 또 비는 쪽은 여자이다. 한참 후에야 문이 열리고 남편은 그녀를 안으며 속삭인다. "널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아내 폭력은 드라마나 영화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내 폭력이 중심소재가 되기보다는 큰 줄거리의 '곁다리'로 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깡패가 된 남자의 가정환경이 이렇더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 곁다리로 나오는 장면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너무 뻔하다. 남편은 별 이유도 없이 여자를 때리고 아내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맞는다.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라치면 여지없이 "내 마누라, 내 집안 일"임을 주장한다. 한바탕 난리가 지나가고 어지러워진 집을 치우는 것도, 자식들을 바라보며 '저것들 보고라도 살아야지'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쪽은 언제나 "아내"이다.

그 '뻔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전형적임'인 동시에 '사실적임'을 의미한다. 직업도, 나이대도, 학벌도 다 다른 그녀들이건만 그녀들이 말하는 남편들의 태도란 너무 '뻔하다'. 이러한 '뻔함'은 "아내 폭력"이 이제까지 이야기되어온 것처럼 단순히 개인의 성격 탓이거나 아내들이 '맞을 짓'을 하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내 폭력"이 사회적 시각에서 해석되고 해결되어야 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정을 해체하라


정희진은 묻는다. "아내 폭력이 가정 안의 폭력인가, 가정에 대한 폭력인가?"라고.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는 갈등과 대립이 생길 수 있고 그것이 자칫하면 폭력적인 상황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가정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폭력의 양상이 항상 '전형적인 방식으로 일방향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있다. 구조화되고 도식화될 수 있는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아내 폭력 또한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정 '안의' 폭력과는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도 생각해보아야한다. 사람들은 흔히 '맞고사는 여자'들에게 아낌없는 동정표를 던지면서도 피해 여성이 어떠한 사회적 대처를 하였을 때는 비난하기 일쑤다. 피해 여성이 경찰에게 신고를 하면 "그깟 일로 사람을 우습게 만든다"고 하고, 피해 여성이 집을 나가면 "자식새끼들 두고 나간 독한 년"이라고 욕한다. 피해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면 "자식의 미래는 생각도 않는 매정한 어미"가 되어버린다.


결국 참고 살라는 거다. 그러나 그렇게 참고 살아서 형식적으로 지켜지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때리는 아빠와 맞고사는 엄마를 보며 자라난 자식들의 미래는 얼마나 밝고 전도양양할까?

"아내 폭력"은 단순한 가정내 분란이 아니라 가정을 위협하는 가정에 '대한' 폭력이다. 이로부터 가정을 지키려면 가정을 해체하여야만 하는 모순이 진리가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내 폭력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내'라는 존재가 얼마나 그릇되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깊고도 철저한 가부장제적 모순, 한부모 자녀에게 쏟아지는 그릇된 선입견들….

만약 어떤 남자가 모르는 여자를 때린다면 어떻게 될까? 남자는 폭행범으로 고소당할 것이고 여자는 피해자로서 정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대신 남편을, 여자 대신 아내를 대입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아내더러 참으라고 한다. 심지어는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이혼하려면 같이 사는 부부가 얼마나 있겠냐?"며 힐난하기도 한다. 뒤돌아서 "여자가 맞을 짓을 했겠지, 오죽하면 남자가 그럴까"라고 수군거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다시 말해 '아내'는 가정의 존속을 위해 '맞는 것쯤은' 참아내야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모성이고 여성의 미덕이고 하나도 갖추지못한 '이기적인 여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피해 여성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이해하고있는지는 의문이다.

지속적인 폭력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폭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그 이전에 왜 가정의 행복을 위해 남편이 좀 '참아줄 수는' 없는지. 가정이라는 곳이 어느 한 사람만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착각에 불과한지를 말이다. 아닌 말로 '맞아죽고' 난 다음에는 그녀를 진심으로 동정해줄까?

여자니까 맞고 남자니까 때린다

앞에서 말한대로 "아내 폭력"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흔히 '맞을 짓을 한다'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아내 폭력"에 있어서 '맞을 짓'만큼 구조적 모순을 대변하는 말이 없음을 정희진은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맞을 짓'이 남녀 역할 규범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적 모순이 남편에게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한다. 이 부분에서 정희진이 든 예는 정말 재미있다.

남편이 돈을 못벌어오면 아내들은 어떻게 할까? 남편을 때리기는커녕 집안의 가장이 그 정도 일(?)로 기죽을까봐 더 남편을 떠받든다. IMF 당시 유행한 '남편 기살리기 운동'이 그 대표적 예이다. 남편이 장인, 장모의 생신이나 제사에 오지않는 일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내가 시집의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어떤 남편들에게는 '같이 안살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무서운 행위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면 '다리 몽둥이가 부서지도록 맞아야 할' 일이지만 남편의 경우라면 '사회생활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일 뿐이다.

이같이 "폭력"이 구조적 문제임을 인식하지 못한 피해 여성들이 아무리 집안일에 매달리고 남편에게 잘 대해도 폭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녀들의 잘못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남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부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만을 상대방에게 주장하는 행위는 결코 옳지 못하다.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이 있고 어느 부부에게나 사소한 대립은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갈등이 있을 때마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결국 "폭력"의 원인은 남편들과 남편들에게 '때릴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가부장제, 그리고 제반 사회구조에 있는 것이다.

정희진이 던지는 물음들, 그리고 내 머릿속의 단상들…

울리히 벡은 사랑, 결혼은 사회 구조적 모순이 담겨있게 마련인데 이를 지나치게 가정 혹은 개인에 한정해서 문제를 풀도록 하기 때문에 문제가 오히려 악화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아내 폭력 또한 이제껏 지나치게 '가정일'로만 치부되어 왔다. 왜 때리는 이는 항상 남편이며 맞는 이는 아내인지, 왜 때리는 남편들은 거의 비슷한 이유를 대며 비슷한 방식으로 아내를 구타하는지. 정희진은 이러한 물음들을 던지며 "아내 폭력이 부부관계의 극단적, 일탈적 현상이 아니라 가족내 남편,아내의 성역할 규범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건"임을 지적한다.

피해 여성이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맞지않을 권리, 신체를 보호할 권리'는 유보시켜야 하는가? 피해 여성의 공포심, 자기방어의 본능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정희진은 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이러한 잘못된 해결방식은 가족이라는 권력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폭력발생 지점을 이동, 순환시킬뿐 폭력 그 자체를 멈추게 하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가족 제도 내에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가족 내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이상적인 가족중심 이데올로기를 담담하게, 그러나 예리하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양한 참고자료와 인터뷰 자료를 더했으면서도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는 피함으로써 자칫 감정적이고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도 최소화시켰다. 정희진의 담담한 어조와 객관적인 이야기 구성은 페미니즘은 급진적이고 시끄러운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진다.

사랑, 결혼, 출산-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일 수 있는 일련의 단어들이 사회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가질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음과 추함은 생각보다 지독하다. 스무해 가까이 고정관념속에서 자라온 내가 한발 한발 조금씩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어지러움과 역겨움 탓일게다. 이 책 또한 내가 얼마나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의 늪에 빠져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였다. 딱히 "아내 폭력"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고정관념의 수치가 어느 정도나 될까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인 듯 싶다.

다시, indian summer

영화 인디언 썸머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도 끝내 사형선고를 '받는다'. 지옥의 저주와도 같았던 폭력에서 벗어났으나 그 폭력에 길들여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여자의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일 게다. 어쩌면 인디언 썸머와, 정희진의 글은 공통적인 메시지를 담고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폭력의 치명적임을, 그리고 여자의 사형선고는 생을 다시 살아보고픈 여자의 마지막 희망이 담긴 몸짓이었을 수도 있음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음,
또하나의문화,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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