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직업을 숨길 순 없어요"

스승보다 나은 제자 이야기

등록 2002.03.30 22:09수정 2002.04.09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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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쪽에서 뽑아 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며, 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훌륭한 제자가 있습니다.


그 해, 1990년은 유난히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태성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남자만 다섯 형제를 고스란히 혼자 힘으로 길러내신 장한 분이셨습니다.

가정환경조사서의 직업란에는 그의 어머니의 직업이 '호텔종업원'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우수한 학업 성적이나 준수한 용모로 미루어 호텔 프런트에서 외국인을 가이드하는 중년의 멋진 부인을 연상하며 그의 어머니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분명한 어조로 어머니의 직업은 호텔에서 청소와 손님 시중을 주로 하는 '잡역부(흔히 '조바'라고 부름)라고 서슴없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더 미화하여 말하거나, 아예 숨기고도 싶었을 어머니의 직업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험한 일 마다하지 않으며 다섯 형제를 길러내신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해 S전자회사로부터 학교로 날아온 입사 추천 안내문에는 가족사항과 인성을 중요시하겠다는 내용이 특별히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실력으로 보나 인성으로 보나 그가 추천되어야 마땅했지만 가족 사항을 중요시하겠다는 회사의 단서조항이 저를 고민스럽게 했습니다. 그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어머니 직업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날 방과 후 저는 그를 불러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다름 아닌, 회사 면접 시험 때 어머니의 직업을 다른 직종으로 바꾸어 말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물론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였지만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는 뜻밖에도 그리하겠노라고 선선히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아침 명상의 시간,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애써 제 눈길을 피하는 그의 얼굴이 몹시 상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안색도 아주 어둡고 슬픈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편치 못한 예감에 사로잡힌 저는 그와의 면담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끝내 눈물을 보이더니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차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 제 어머니 직업을 숨길 순 없어요. 한 번도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요. 만약 제 어머니가 호텔에서 조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런 회사라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 그리고 진실하고 당당한 삶의 자세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저의 제자이자 작은 스승인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에 성년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만 20세가 되는 사람을 성년으로 인정하고 기념해주는 날이기에 고등학교의 경우는 학교 전체를 통털어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합니다.

그 해 그는 학교에서 유일한 성년의 날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그의 삶의 모습과 내면의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한 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배태성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그윽해진다

너의 건강한 웃음에서 쏟아지는
진실한 삶의 빛들이
가끔은 나의 어둠 밭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너는 나의 제자이자
스승이다

해룡면 신성포 근처 마을
너의 고향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험한 일 마다 하지 않으며
다섯 형제를 키워내신
어머니 슬하에서

너는 바닷바람의 사나운 격랑을
오늘의 승리하는 삶으로 일구어냈다

때로는 너에게서
해그늘 같은 아득한 그림자를 본다

어찌할 수 없는
부정(父情)에의 목마름에
숨죽이며
딛고 일어서는 슬픈 의지를 본다

사랑하자 우리
고난의 때를

어찌 눈물 없이
성년(成年)이 되었다 말하랴

어찌 수고 없이
해지는 들녘에 서 있으리

이제 정녕
영원을 향한 기쁜 몸짓으로
삶을 불사르자

한 알의 섞어지는 밀알이 되어…


그후 학교에서는 그가 취업 추천을 거부한 일로 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직업을 속여서라도 S전자에 들어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한 길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태성이를 더 이상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가 그의 삶 속에서 너무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인간의 아름다움 말입니다.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재산을 S전자의 상표와 맞바꾸라고 차마 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는 완도에서 도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아직은 고단해보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더워지곤 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그가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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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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