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자식을 묻고 한을 안고

<참된 세상 꿈꾸기> 의문사 장병 유족들의 슬픔을 보며

등록 2002.04.12 16:29수정 2002.04.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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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1일, 목) 오전 충남 논산의 군 병원에서는 1999년 12월 군에서 사망한 김대성 이병에 대한 영결식이 있었다고 한다.


고(故) 김대성 이병은 1999년 9월 입대하여 보병 제5사단 27연대에 근무하던 중 12월 3일 08시경 '훈련 교통로'에서 이마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군 측은 김대성 이병이 자살을 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명확한 타살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살로 추정했고, 그것은 결국 '결론'이 되고 말았다.

유가족은 초동 수사 때부터 수사관이 공공연히 자살이라고 하였으며, 발사 총기가 선임 병사의 총인 점과 선임 병사 철모의 턱 끈이 떨어진 점, 그리고 그 선임병의 옷에서 화약이 검출된 점, 현장 보존을 하지 않은 점, 유가족이 오기도 전에 사체의 옷을 벗기고 몸을 닦은 점 등을 들어 강력하게 타살 의혹을 제기하여 왔으나, 결국 그 의혹을 규명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유가족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측의 강력한 의혹 제기와 군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말미암아 고 김대성 이병은 세상을 등진 날로부터 2년 4개월여 동안 군 병원 사체 보관실의 차디찬 냉장고 안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끝내는 유족들이 의혹 해소는커녕 한(恨)만 더욱 크게 안게 된 상황 속에서 김대성 이병의 시신은 냉동실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비통하기 짝이 없는 영결식을 지켜보던 '천주교인권위원회 군의문사/군폭력대책위원회(이하 인권위)' 홍기영 간사는 유가족 앞에서 울기가 뭣해서 혼자 적당한 곳을 찾아 한참이나 울었다고 했다.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 고 김대성 이병과 유족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이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제3자인 자신이 그럴진대 당사자인 유족들의 심정은 어떻겠느냐고 홍 간사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은 메일과 전화에 의존하면서 충남 태안의 내 집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고 김대성 이병의 아버지는 내가 며칠 전에 직접 뵌 분이었다. 지난 8일(월) 경기도 포천의 '승진회관'에서 있은 '고 강의택 하사 사망사고 수사결과 공개발표' 자리에서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3년 전에 죽은 아들의 시신을 논산 군 병원의 사체 냉동실에다 두고 강의택의 일을 돕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어느 분의 귀띔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초췌한 모습이던,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던 그 분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그 분의 모습을 보는 순간 '웃음이 사라진 얼굴'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엾음과 안쓰러움으로 가슴 한구석이 에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어제 있었다는, 논산 군 병원에서의 그 한 많은 영결식 상황을 전해 듣고 난 지금 또 한 차례 막막한 슬픔 같은 것이 내 가슴을 훓고 지나는 것을 느낀다.

며칠 전 포천 길에 동행을 한 사람들은 모두 25명이었다. 그 중에서 고 강의택 하사의 유족들은 7명, 인권위 관계자는 2명(오창래 조사위원, 홍기영 간사)이었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군의문사유가족협의회(이하 군가협)' 회원들이었는데, 여자들이 대부분인 그들 중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고 김대성 이병의 아버지 외로 또 한 명의 남자 분은 1999년 5월 군부대에서 초소 근무 중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고 김기태 일병의 아버지 되는 분이었다.

고 김기태 일병은 명지대 재학 중이던 1998년 12월 입대하여 제25사단 72연대에 근무하던 중 1999년 5월 29일 야간 경계 근무를 서던 초소에서 사망했다. 군 측은 김기태 일병이 K-2 소총 총구를 이마에 대고 발사하여 자살을 했다고 발표했다.

유가족은 김기태 일병의 이마가 깨어지고 찢어진 것으로 보아 총상으로 인한 사입구가 아니며, 뒷머리의 상처도 위에서 아래로 예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총알이 나온 사출구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확실하며, 눈이 찢어지고 멍이 들어 있는 데다가 코뼈가 부러져 있는 점, 총상에 의한 사망에 심폐 소생술을 실시하고 링거주사를 놓은 점 등을 들어 구타로 인한 사망으로 보고 강력하게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그 의혹 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김기태 일병 역시 몇 년이 지나도록 군 병원 사체 보관실의 냉동실 안에 누워 있는 것이다.

고 김기태 일병의 아버지는 기태가 외아들이라고 했다(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 시대상을 반영하듯 군가협 회원들은 대개 외아들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부인뿐이라고 했다. 친척들에게도 일체 알리지 않았고, 모시고 사는 팔순 노모께도 쉬쉬하고 있다고 했다.

"외아들이 죽었으니 그걸 어떻게 어머니께 알려 드립니까. 어머니께서 그걸 아시는 날에는 그날로 쓰러져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요. 그래서 우리 기태가 지금 미국에 가 있다는 말로 어머니를 속이고 있는데, 할머니도 뵙지 않고 미국에 가 있는 손자녀석의 소행을 설명하고 어머니를 납득시키려니 이런저런 거짓말을 자꾸 더하게 되고,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적마다 몰래 울어야 하고….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아들 죽음의 의혹을 반드시 규명하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은 결코 자신에게만 국한된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인권 후진국'의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을 위해서도, 그리고 국가 양심을 위해서도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온 저녁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나는 군가협 회원들, 아들을 군에 보냈다가 어이없이 잃고 만 어머니들의 한없는 슬픔을 절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의문사'라는 거대한 추상 명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폭압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씌운 채로 '자살'이라는 이름의 진구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데서 오는 한의 실체 바로 그것이었다.

"군대가 내 아들 하나만을 죽인 게 아니에요. 이 에미도 죽이고, 우리 가족 모두의 생활을 죽였어요."
"군대가 내 아들을 죽였으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살로 처리를 하려는 것, 그것으로 모든 일을 종결지으려는 것은 국가의 직무 유기예요."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군대에서 한해 평균 300명 이상이 갖가지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고 그 중에 100명 이상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가 그것에 상응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건 언어도단이에요"

군대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들 중 자살로 처리되는 비율이 그렇게 높은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은 지휘관의 지휘 책임과 관련되는 사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고사일 경우 사안에 따라서는 문책 범위가 연대장급까지 미친다고 한다. 진급에 막대한 지장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일 경우에는 문책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망사고를 수사하는 군 수사기관(주로 사단이나 군단의 헌병대)의 수사 책임자는 대개 영관급 장교다. 해당 부대의 대대장이나 연대장과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는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 쪽을 편들기가 쉬운 심리 문제를 꼽을 수가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죽은 자는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또 오랜 세월 군대의 폐쇄성 속에서 그것은 거의 관성화되어 온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양심과 정의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네 삶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진실과 양심이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구속력도 미약하고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군인에게는 진실과 양심을 아우르는, 비겁하지 않은, 떳떳하고 반듯한 군인 정신이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지만, 그것이 출세지향주의나 권력 추구 의지 따위를 덮어 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할 때 군가협 회원들이 군 수사진을 향해 "너희들은 군인도 아니야!"라고 절규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심장하다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군 수사기관의 수사 기법이나 수사 역량의 한계다. 군대 내 사망사고에 대한 수사를 군 수사기관에 맡기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논법을 동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군 수사기관이 자체 한계를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민간 수사기관에 일임하든가 최소한 합동으로 수사를 하는 일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최선의 효율적인 방안을 모색하기는커녕 천주교 인권위가 최근 53사단에서의 조사 과정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군 긴축 차원에서 수사관의 30%를 줄였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무지막지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로서는 궁금한 것이 많아 군가협 회원들과 천주교 인권위의 활동상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아들이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하기 전에는 천주교 인권위의 존재조차도 전혀 몰랐으나 사건 발생 직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권위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한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의문사 장병 유족이 되기 전에는 군 의문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더러 듣기야 했지만 내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남의 일로만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까 그렇게 무관심했던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정말 그래요. 나는 군 의문사 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고, 그 무관심에 대한 벌로 오늘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거예요."

그 분의 그 말에 의문사 장병 유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비통한 표정 속에는 부끄러움과 함께 회한의 빛이 교차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강의택 사건 발표회' 자리에서 질의를 끝내고 난 인권위 오창래 조사위원이 병사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러분이 현재 복무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대에서 한해 300명 이상이 죽고 있어요.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또 발생할지 몰라요.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친구, 동생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거요. 이해해주기 바래요."

이 글을 거의 끝내가고 있는 지금 나는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떠올린다. 천주교회에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기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으로부터 죽은 후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가지 사건들을 상기하면서 (그 표지들 앞으로 돌면서) 하는 기도이다. 올해는 평신도인 내가 그 기도문을 만들어서 우리 교회공동체의 기도 예절 때 사용을 해 보았다.

그 '십자가의 길' 기도의 '제8처 기도문'을 여기에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군 의문사 장병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를 드리고 '천주교인권위원회' 여러분과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운 뜻을 표하며….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여인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며 울고 있는 오늘의 여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여인들 중에는 다 키운 아들을 군에 보냈다가 어이없이 잃고 만 어머니도 있습니다. 전시도 아닌 이 시대에 우리 나라 군대에서 한해 평균 300명 이상이 사고사로 숨지고 있고, 그 중에서 1/3에 해당하는 100명 이상이 자살로 처리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주님, 군에 간 아들이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오열하는 어머니, 말로만 듣던 군대 내 의문사의 실체를 접하고 매일을 눈물 속에서 사는 어머니들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더불어 그런 놀라운 일들을 눈앞에 두고도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저를 질책하여 주십시오. 그런 일을 전해 듣고도 마냥 남의 일로만 여기고 살아온 저에게도 장차 군에 갈 아들이 있음을 일깨워 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 *지난번 글에서 '천주교인권위원회 군의문사/군폭력대책위원회' 오창래 위원을 위원장으로 표기한 것은  필자의 착오였다. 오 위원과 인권위 관계자 여러분께 죄송한 뜻을 표한다.

덧붙이는 글 *지난번 글에서 '천주교인권위원회 군의문사/군폭력대책위원회' 오창래 위원을 위원장으로 표기한 것은  필자의 착오였다. 오 위원과 인권위 관계자 여러분께 죄송한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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