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내 몸은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

등록 2002.04.13 01:06수정 2002.04.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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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늘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는 새벽 5시 10분. 새롭고 청량한 기운이 하늘과 땅에 가득합니다. 오늘도 휘파람새가 나를 깨웠습니다. 두어달 지나면 산란기의 소쩍새 울음에 잠을 설칠 것이고 그때도 휘파람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새벽에 나를 깨울 것입니다.

요즘 내 잠을 깨우는 것은 휘파람새 소리입니다. 휘파람새 소리는 낡은 한옥 부엌문이 여닫히는 소리입니다. 비이익. 비이이익 하는 휘파람새 소리를 처음 들을 때는 정말 사립문이 바람에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맑고 가녀린 것이 화살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나는 소리입니다. 새벽 1시경부터 울기 시작하여 이때쯤 나를 깨워 놓고는 증발해버리는 새입니다. 나는 휘파람새 소리를 들을 때마다 꼭 9년여 전. 휘파람새 소리에 새벽을 맞던 그 춥고 모질었던 겨울을 떠 올립니다.

마당에 서서 크게 스트레칭을 한다

온살돌기, 허리 돌리기, 기러기 날기, 바위밀기, 회춘공, 마타공, 손벌려 가슴젖히기, 빨래널기... 그리고 숨고르기. 하늘도 배가 불룩해 지도록 들이켜 마시고 별도 한 소쿠리 담아 마시고 시린 새벽 초목의 이슬도 쓸어 담아 마십니다. 이 의념 호흡을 하면 몸이 뿌득뿌득 소리를 내면서 온 몸의 세포가 각기 살아납니다. 내 몸을 통해 하늘이 땅에 내려와 닿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통해 땅이 하늘로 올라 가게 하는것입니다.

지금 날이 새는 것이 꼭 산사태 나는 것 같습니다. 새벽을 가리고 있던 질긴 어둠이 어느 한 순간에 이르러 순식간에 걷혀 버립니다. 너무도 느린 나머지 잘못 일어났나 싶어 시계를 다시 볼 정도로 더디게 흐르던 시간이 산사태 나듯이 쏟아져서 그렇습니다. 호미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쳐다 볼 때마다 새벽은 달라집니다.


제일먼저, 서쪽인지 동쪽인지 구별없이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희뿌연 실선이 생겨납니다. 먼동이 터 오기 전에는 분명 동서 구분없이 그러합니다. 그리고는 땅과 하늘이 먼저 나뉘어지고 점점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제 모습으로 구별되어 갑니다. 이때쯤이면 컹컹 개짓는 소리도 나고 시내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자동차 시동소리도 납니다. 공기의 색깔도 달라집니다. 암청색이었다가 결국은 회색을 거쳐 투명해집니다. 암청색 물질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아서 선뜻 마당으로 나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않은 잡초는 왜 그리도 잘 자라는지...


애써 매 논 감자밭에 잡초들이 왕성하게 고개를 내 밀고 있습니다. 아직 감자순이 솟지도 않았는데 징그러운 잡초가 벌떼처럼 번성하고 있습니다. 일산에서 농사짓는 후배가 가르쳐 준대로 보온 마 덮개를 구해야겠다 싶습니다. 풀을 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그동안 몇 년간 생태농을 하면서 제일 큰 일거리가 잡초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땡볕아래 밭두둑을 걸터타고 비지땀 흘리며 허리가 접혀 나중에 일어 설 때는 팔 따로 다리 따로 허리 따로 하나씩 뜯어내듯이 펴야하는 식으로 풀을 매도 돌아서면 그대로입니다. 아주 질려 버립니다. 그래서 신문지로 덮어 보기도 하고 사료부대로 구해서 한 장씩 뜯어 밭두둑을 덮기도 하였습니다.

밭두렁이나 밭 골의 풀을 일정기간 길러 가지고 베어 덮는 방법도 써 봤습니다. 근데 노동력이 너무 소요됩니다. 올해는 귀농운동본부에서 나온 '풀밀어'라는 수동식 기계구입도 검토중입니다만 양계장 등에서 사용하는 보온 마 덮개가 제일 좋을 듯 합니다.

변산에 사시는 윤병구 선생은 아예 "잡초는 없다"(1998. 보리출판사)고 선언하셨지만 아직 나는 개명이 덜 되어선지 잡초가 제일 먼저 눈에 찹니다.

창조적 노동. 종합적 노동. 전인적 노동

개울가에 자라 난 내 손바닥만한 머위를 땁니다. 한잎 씹으면 이빨 사이에서 씁쓰레한 향기가 입맛을 돋웁니다. 작년에 시설했던 방울토마토와 오이 지지대를 걷어 냈습니다. 거름을 한번 뒤집어 줍니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노동. 자발적인 노동입니다. 내 마음대로 정해가면서 하는 노동. 창조적인 노동입니다. 이것저것 골고루 하는 노동. 종합노동입니다.

농부가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의 어원을 떠올려 봅니다. 소외가 없는 노동. 노동 생산물로부터 조롱당하지 않는 노동의 주체. 죽은 노동(상품)이 산노동(노동자)을 지배하는 거꾸로 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살아 있는 노동의 세상. 농촌은 이것이 가능한 곳입니다. 생태적으로 살겠다는 의식의 전환만 분명하면 분명 그렇습니다. 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그럴 것입니다.

돈의 비중이 낮은 인간관계

자연의 일부로 내가 편입되는 느낌이 듭니다. 할아버지 무릎위에 앉혀진 손주 같습니다. 조화롭게 함께 사는 지혜를 얻습니다. 안 그러면 살지 못하니까요. 이웃들과 맺어지는 '관계'에 돈이 작용하는 비중이 현저히 낮습니다. 돈 이외의 여러 인간적 요소들이 돈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막 심은 이 감자 이 호박 이 옥수수 이것들을 내가 키우는 게 아님을 이제 압니다. 감히 내가 키우겠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하늘이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햇볕이 강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쪼여주지 않으면, 바람이 불어주지 않는다면 농사는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이 작물들이 이토록 방긋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 겸허히 허릴 굽힙니다. 괭이를 잡은 손에 공손히 힘을 가합니다.
참 신성스런 새벽입니다.

새벽 6시 30분...

오늘은 저수지 밑으로까지 물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더니 지금은 반란군에 쫓기는 부패한 관군들처럼 낙오병 몇몇을 떨구어 놓고 부리나케 산기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걸린 안개 한 조각이 파란 하늘에 비쳐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수지에는 하늘이 담겨 있고 저수지는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목욕탕을 나서며 머리를 뒤채는 소녀처럼 싱싱한 집 앞 목련의 새하얀 꽃송이가 유난히 탐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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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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