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장의 엽서에 쓴 여행기

안준철의 <시와 아이들> 보물찾기

등록 2002.04.17 00:04수정 2002.04.1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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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를 샀다. 여섯 장의 여백을. 너는 엽서의 하얀 여백 앞에서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니? 문학소년 시절, 글이 잘 되지 않으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엽서를 사곤 했단다. 수신인의 주소와 이름을 먼저 쓰고, 그리고 마치 소중한 이에게 편지를 쓰듯 깨알같은 글씨로 엽서의 하얀 여백을 메워 가기 시작했지.

단 한 자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무서운 습작 훈련인 셈이었어. 지금도 나는 엽서의 하얀 여백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단다. 불현듯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충동이려니와, 하얀 여백 위에 생의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싶은 그런 마음, 이해하겠니? 신이 주신 여섯 장의 엽서 가운데 지금 나는 몇 장 째의 엽서에 생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너는?

성산 일출봉에서 은화처럼 빛나던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 지금도 가시지 않는구나. 보물찾기라면 국민학교 때부터 워낙 소질이 없었지. 그래서 두 주일 먼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너에게 여행지 어딘가에 보물 하나를 숨겨두고 오라고 말했을 때도 내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단다.

그런데 네가 날린 암호 같은 문자메시지를 어렵사리 해독하여 찾아낸 그 보물로 제주도 관광엽서를 한 세트 사서 여행기를 써 보내라니, 그건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니?

배가 여수항을 떠난 것은 아침 8시 30분. 7시간 반 뒤인 오후 4시나 되어서야 제주항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질겁을 했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내 배낭 속에는 사두기만 하고 미처 읽지 못했던 두 권의 소설책이 있었거든.

갑판 어느 후미진 구석에 신문지를 깔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 책을 읽다가 그것이 조금 따분해지면 난간에 기대어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면 될 테니까. 참, 너는 보았니? 검푸른 바다가 뱃전에 부서지면서 엽서의 하얀 여백 같은 속살을 드러내는 그 황홀한 광경을.

갑판에서 수정이란 아이를 만났단다. 시를 쓰는 아이. 내게는 그렇게 인상 지워진 아이야. 처음에는 깊게 눌러쓴 모자 때문에 그 아이가 내 곁에 와 있는 것도 몰랐지. 자세를 고치려고 몸을 뒤척이다가 그 아이의 다리를 먼저 보게 된 거야.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응. 그런데 너무 슬퍼."
하얀 포말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 아이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지. 그런데 이 아이는 언제부터 내 곁에 와 있었던 것일까?
"30분쯤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아름다웠어요. 책을 읽고 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는 그 사람의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는 아니? 아름다움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숨소리를 죽여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그 아이의 눈빛을 상상해볼 수 있겠니? 잠시 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 난간 쪽으로 갔단다. 배는 이미 바다 한 가운데에 와 있었지.


검푸른 파도가 폭포수 같은 소리를 내며 뱃전에 부서지는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제안을 하게 되었단다. 파도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생각들을 서로 말해보기로 말이야. 일종의 문학수업인 셈이었는데 5분쯤 지났을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지.

"저 파도를 잘 봐. 배에 부딪힌 파도가 물러나면서 작은 산들을 이루고 있어. 그 절정에서 마치 산에 눈이 내린 듯 하얀 포말이 일었다가 다시 스러지고, 그리고는 다시 산을 만들고 있어. 반복 또 반복이야. 아름답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고. 저 반복의 일상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검은 파도가 부서지면서 어떻게 저렇게 하얀 색깔을 낼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정반대잖아요. 물론 저도 그렇구요. 부서지고 깨어질수록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파도가 바다 속까지 들어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가령 파도가 어떤 작은 물고기를 건드려 방향감각을 잃게 하여 큰 고기의 밥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선생님, 이렇게 넓은 바다에 배가 지나간 자국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요. 보세요. 온 바다가 배가 지나간 흔적으로 가득 차 있어요."

정말 그랬단다. 배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흔적은 우리의 시야가 끝나는 그곳까지 부채살처럼 드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어. 작은 배 한 척이 지나간 자리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지. 내가 너를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을까?

너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 바로 그날, 나는 수정이를 다시 만났단다. 우리가 계획한 보물찾기에 대한 전말을 모두 이야기 해주었지.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아이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나.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빛나고 있는 그런 눈빛을 너는 상상할 수 있겠니? 그 아이는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은 그 다음날, 신의 동산인 성산 일출봉에 올라 네가 숨겨놓은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찾아 손에 쥐고 내려오는 길에 풀 수 있었단다. 무슨 얘기 끝이었을 거야. 그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지.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왜 집을 나가셨는지. 엄마의 가출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죠. 처음엔 엄마가 미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오히려 집안 친척들이 엄마를 미워하고 욕하고 하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엄마를 미워하는 것을 저를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제 마지막 한 장의 엽서가 남았다. 아무래도 제주도 여행기를 여섯 장의 엽서에 다 적어 보내는 일은 어렵겠구나. 여행 목적지인 제주도에 닿기 전 선상에서의 일들이며 수정이와의 만남에 너무 많은 엽서를 써버린 잘못을 인정한다 해도 후회스럽지는 않단다.

여섯 장의 엽서를 사람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한 셈이니까. 그리고 성산에서 내가 찾은 보물은 오백 원 짜리 동전 두 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서지고 깨어질수록 아름다운 속살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 아이. 그런 아름다운 바람을 이미 이루어가고 있는 아이. 자신의 상처를 시의 보석으로 만들 줄 아는 아이.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아는 바로 그 아이가 내가 찾아낸 보물이 아닐까?

추신: 신이 주신 너의 엽서, 그 하얀 여백에는 지금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덧붙이는 글 | 지금 3학년이 된 당시 1학년 아이들과 수학여행차 제주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들아이는 저보다 두 주일 전에 같은 장소인 제주도로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구요. 두 주일 간격으로 아들과 제가 같은 땅을 밟게될 것을 생각하면서 뭔가 추억을 하나 만들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었습니다. 아들아이에게 보물찾기를 제안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금 3학년이 된 당시 1학년 아이들과 수학여행차 제주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들아이는 저보다 두 주일 전에 같은 장소인 제주도로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구요. 두 주일 간격으로 아들과 제가 같은 땅을 밟게될 것을 생각하면서 뭔가 추억을 하나 만들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었습니다. 아들아이에게 보물찾기를 제안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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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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