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싹이 돋기까지의 내 우여곡절

<귀농일기> 새하얀 감자꽃을 기다리며

등록 2002.05.02 12:17수정 2002.05.02 23:0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감자밭으로 풀을 매러 나갔다.
손바닥만한 동네라 입소문도 빨라서 동네 끝집에 사는 조양호가 어떻게 알고는 털레털레 밭으로 나왔다. 장갑도 끼지 않고 평상복 그대로라 행색을 봐서는 성스러운 밭일에 끼워줄 게재가 아니었지만 네살배기 유나도 나오고 100일이 갓 지난 둘째를 들쳐업은 유나 엄마까지 온 가족이 총 출동을 한지라 성의가 가상하여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감자 순 따 주기

감자 순을 따는 작업을 했다. 두세 개씩 되는 감자 눈에서 다 싹이 돋아 있어서 제일 실한 놈 하나만 남기고 없애주는 작업이다. 대안중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에서 봄방학을 맞아 1주 동안 집에 와 있는 새날이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도 해 보겠단다. 애써 키워 가지고 왜 감자 순을 따내는지 새날이가 물었다.

"감자는 뿌리식물이라 잎이나 줄기로 영양분을 다 빼앗기면 알이 안 굵겠지?"
내가 말했다.
"감자잎은 쓸모가 없기도 하고."
"그럼 줄기 하나는 왜 남겨둬요?"
"이런~ 광합성작용도 몰라? 다 따주면 감자가 죽잖아."

조양호는 쏘물게 난 감자를 파 옮기는 작업을 하게 했다. 비 온 뒤끝이라 신발과 손에 밭흙이 범벅이 된다. 새날이는 벌써 힘이 드는지 아니면 방학 때 집에 와서도 일 한다는 게 싫어졌는지 해찰을 부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는 무논 매듯이 설렁거린다. 유나랑 또 장난질이다. 내가 말을 걸었다.

"새날아 감자 순 따는 걸 사람으로 예를 들면 말이다. 우리집에 자식이 너랑 새들이랑 둘이잖니..."
"아! 네. 당연히 새들이를 다리 밑에다 갖다 버려야겠지요?"
새날이가 감자순 따기로 관심을 거두어 들이면서 날쌔게 대꾸하였다.
"새들이도 아마 그 점은 인정할 거예요. 이 누나가 워낙 실한 사람이잖아요."
우쭐해진 새날이는 내 의도대로 한참을 더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하는 손매도 야물어져 갔다.


귀농자들의 일기에는 꼭 '옆집 할아버지'가 있다

▲ 감자 눈을 따서 장작 군불을 넣고 모아 두었던 재에 버무렸다. 나흘간 방에서 움을 틔웠다. ⓒ 전희식
무릎에 앉혀 얼르는 심정으로 새날이 곁으로 갔다. 감자 순을 잘라주기만하면 그곳에서 다시 순이 돋으니까 감자 순 주위 땅을 왼 손바닥으로 꼭 누르고 순을 쭈욱 뽑아야 된다고 알려주었다. 시범도 보였다. 이 시범은 어제 임학동 할아버지가 내게 보여주신 시범이다. 먼발치에서 내 시범을 보는 조양호 표정에서는 감탄과 존경이 교차한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슬로우모션으로 재차 시범을 보여주었다.


임학동 할아버지는 식목일 전날 산에서 나무를 하던 나를 깜짝 놀라게 하셨던 분이다. 식목일에 동네서 나무를 심는다 하기에 솎아베기 하고 남은 통나무를 군불감으로 끌어내서 지게에 지고 산밑으로 옮기던 나는 왠 기계음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 봤다가 깜짝 놀랐다.

기정이 할아버지가 관리기(경운기보다 작은 다목적 농기계. 밭을 갈거나 씨도 뿌리고 간이 로타리 작업을 하는 기계)를 몰고 우리 감자밭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임학동 할아버지는 밭가에서 뭐라뭐라 소릴 치시며 지팡이를 휘두르고 계시고 아내는 감자를 캐고 있었다.

세상에! 심은지 1주만에 감자를 캐다니! 지게를 팽개치고 나는 부리나케 밭으로 달려갔다. 임학동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우리집에 가서 큰소리 쳤음직한 그대로 나에게도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하면 나는 새경은커녕 밥도 안 줘."
할아버지는 기세가 등등하셨다.
"아예 풀을 키우지 풀을 키워. 이래 가지고 감자가 어떻게 자라! 응? 어떻게 자라냐구!"

▲ 싹이 튼 대신 감자씨는 쪼그라 들었다. 새들이를 상심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전희식
임학동 할아버지가 기정이 할아버지를 불러내서 밭을 로타리치게 하신 게 분명했다. 남의 밭을 맘대로 갈아엎는 이 할아버지. 팔순을 오래 전에 넘기신 임학동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 최고의 권력자다. 최고의 독재자다. 독재자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나지만 이 할아버지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 인정이 많고 욕심 없는 것은 보통 시골할아버지와 같지만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점은 다른 분들과 다르다. '고집'이 아닌 '기개'가 느껴지시는 분이시다.

<생명농법>이 <관행농법>에 지다

아내도 그랬겠지만 나도 생명농법이니 태평농법이니 하는 설명을 포기했다. 밭도 안 갈고 괭이로 구멍만 파서 감자씨를 넣은 우리밭은 풀만 무성해지고 있었으니 할아버지 눈에는 올 우리집 감자농사는 영락없이 실농하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기정이 할아버지가 이른 아침부터 자기 일처럼 관리기를 끌고 나오신 것도 이해가 된다. 만성 심장질환으로 자주 졸도를 하시기도 하는 기정이 할머니가 내 부황요법으로 눈에 띄게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보답을 하시려고 벼르고 계셨을 것이다(올 초 지리산에서 2박3일 동안 부황과 뜸을 이용한 대체의학 전문강좌를 수강하고 나서 효험을 보고 있는 부황요법은 다음에 소개할 생각이다).

▲ 땀과 비에 젖으며 감자밭을 매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하는 오늘의 주인공. ⓒ 전희식
나도 감자를 캐서 관리기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묻어주었다. 쪼갠 감자눈을 아궁이에서 퍼낸 재에 버무려서 따뜻한 방에서 근 나흘 동안 싹을 틔워 가지고 밭에 심었던 것이라 땅 속에서 이미 노오란 감자싹이 제법 자라 있었다. 싹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심었다.

멀리 강원도에서 이곳까지 시집 온 씨감자가 1주만에 다시 캐어지는 수난을 겪는 것이다. 감자눈을 딸 때 곁에서 거들었던 새들이가 감자를 심으려고 재에 버무려 놓았던 감자를 꺼냈을 때 눈에 띄게 쭈굴쭈굴해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던 표정이 떠오른다.

새로 난 싹을 자식에 비유하고 쭈굴쭈굴해진 감자씨를 엄마아빠에 비유해서 설명했더니 시무룩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때 새들이는 그랬다. 감자씨 하나에 감자가 몇 개나 달리냐고 물었었다. 크고 작은 놈 여남은 개는 달린다고 했더니 새들이는 다행스러워하면서 우리는 꼭 남매 둘뿐이니까 엄마아빠는 더 늙지 않으셔도 되지 않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잔인하게도 이 감자씨가 땅속에 들어가 썩어야 감자가 열린다고 일러 주면서 새들이의 기대 섞인 희망을 꺾었다.

올해는 매년 심던 미국이 원산지인 <남작>을 포기하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 농장의 소개로 강원도에서 씨감자를 구해 왔던 것이다. 이 감자는 이름이 <수미>다. 남작(男爵)은 파근파근하여 삶아먹거나 구워먹기는 좋지만 병에 약하고 보관이 어렵다. 특히 2기작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 초에 귀농학교 동문들이 모여 올해 영농계획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아는 선배가 알려준 것이 바로 <수미>다. 감자 반찬에 적격이라는 점보다 더 내 관심을 끈 것은 2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른 봄에 심어 여름에 캔 다음 한 두 달 후에 다시 심어 가을에 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씨감자 보관 걱정을 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마철이 시작되는 때가 감자 캐는 때라 매년 집안에 감자 썩는 냄새가 앙등을 하곤 했었다.

감자 농업사의 진기록

밭 저쪽에서 조양호가 나를 오라고 했다. 감자가 밭두둑 따라 나란히 났는데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것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아마 관리기에 쫒겨 부리나케 감자를 캐내면서 놓쳤던 것이 자라난 것인가 보다고 했다. 감자를 캐 옮기면서 우린 그랬다.

"우리나라 농업사에 1주만에 캐낸 감자도 없을 테지만 옮겨심기하는 감자도 전무후무할 것이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