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愛)'에 대한 황당한 해석(?)

'愛=受+心'는 근거 없는 속설일 뿐

등록 2002.05.09 20:07수정 2002.05.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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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이라고 제목을 붙인 글에서 저는 한자문화권의 '사랑(愛)'은 '힘들지만 참는 것'이라고 해석했었습니다. 이 해석은 사랑 애(愛)자의 파자해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애(愛)자가 '목메일 기'와 '마음 심'과 '뒤져올 치'자의 합자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요.

한편 한 독자께서는 애(愛)자는 '받을 수(受)'자의 중간 부분에 '마음 심'이 끼어든 형태라는 다른 파자해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사랑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앞서의 제 해석과 그 근거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주장이어서 글을 더 이어가기 전에 먼저 그 점부터 밝혀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의 주장 중에 파자해와 그 해석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자라는 것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형체나 모양을 본 따서 만든 상형문자이고 구조상으로 볼 때 사랑 애(愛)자는 받을 수(受)자와 마음 심(心)자 이 두 글자의 결합으로 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 중에서 받을 수(受)자의 갑골문 원형그림을 보면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손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위쪽의 손은 손 조(爪)자이고 아래쪽 손은 변형되어 '뒤져올 치'자가 되었지요. 그리고 그 손과 손 사이에 '물건 형상 멱'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결국 받을 수(受)자는 두 개의 손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 애(愛)는 그것에 마음 심(心)자가 추가 된 것이죠. 따라서 사랑 애(愛)의 한자문화권적인 원래 뜻은 괴롭다 힘들다 뭐 이런 나쁜 뜻이 아니라 <서로 마음(心)과 마음(心)을 주고받는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globe'님의 답글 중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오늘날의 사랑 개념에 가깝고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해석이므로 더더구나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럴듯하고 일리있는 파자해가 의미가 있을 때도 없지 않습니다. 가벼운 이야기나 아이들 교훈용으로 사용할 때는 특히 그런 '일리있'는 해석이 더 편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 말마따나 "오마이뉴스는 신문이고 신문 기사는 정확해야' 합니다. 파자해가 정확하다는 것은 개인의 상상력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뜻일 겝니다. 한자 파자해의 경우 그런 객관적인 증거는 신빙성 있는 문헌을 가리킵니다.

한자는 7천년쯤 전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3500년 전쯤에는 완전한 문자체계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주로 전서(篆書)체가 가장 보편적인 필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약 2천년 전부터 필기구로 붓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글씨체가 잠깐의 예서체를 거쳐서 해서체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필기도구와 필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아주 중요한 변화를 낳았습니다. 글쓰기가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자형이 자주 변형되어 이체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체자들은 글자의 어원을 밝히는 데에 어려움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슈우셴(許愼)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전서체 글자들을 중심으로 각 한자의 어원을 밝혀놓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편찬했습니다. 서기 2백년 경, 그러니까 지금부터 1800년전의 일이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슈오웬시오쯔(說文解字)'라고 부르는 이 책은 그때 이후로 한자 어원을 밝히는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파자해(破字解)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문헌은 설문해자를 중심으로 후대의 해석을 보강한 '쫑웬쯔푸(中文字譜)'라는 책입니다. 타이완 타이뻬이 소재 한루(翰蘆)도서출판사가 펴낸 것으로 최근에는 예일대학의 릭 하버그(Rick Harbaugh)교수에 의해 영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각 한자의 어원적인 의미를 부수별로 모아서 계보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원래는 원제목대로 읽어주어야 하겠지만 편의상 한국식 한자음으로 '중문자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분석에 따르면 愛자는 두 단계로 그 어원이 밝혀져 있습니다. 우선 '마음 심'을 포함한 윗 부분과 그 나머지인 '뒤져올 치'자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대에는 (여기서 고대는 슈우셴의 시점에서 본 고대입니다) '뒤져올 치'자가 없는 윗 부분만으로도 '사랑'이라는 뜻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고대형의 중국 발음은 오늘날의 愛와 마찬가지로 '아이(4성)'였습니다. 아랫부분을 이룬 '뒤져올 치'자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는군요.

愛의 윗 부분은 다시 '목메일 기'자와 '마음 심'의 합자라고 중문자보는 밝히고 있습니다. 친절하게도 음식물을 삼킬 때에 그 음식물이 목구멍을 틀어막거나 혹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가리킨다는 설명이 덧붙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한자문화권의 사랑(愛)이 "힘들어도 참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근거입니다.

한편 그 독자의 주장을 조사해 보기 위해서 '받을 수(受)'자의 어원 분석도 찾아보았습니다. 수(受)자는 '손톱 조(爪)'와 '또 우(又)'자의 합자로 풀리어 있습니다. 그 독자의 주장과는 달리 수(受)자에 쓰인 맨 아랫부분은 '뒤져올 치'가 아니라 '또 우'자입니다.

게다가 가운데에 끼어있는 '점 없는 갓머리,' 즉 '덮을 멱'자 같이 보이는 것은 원래 '배 주(舟)'자의 변형태라고 합니다. 그것은 수(受)자의 '발음'을 결정하는 글자였다는군요.

실제로 수(受)자의 고어형에는 '배 주(舟)'자 변형태로서의 '점 없는 갓머리'가 끼어있지 않습니다. 그냥 손으로 무언가를 잡는 모양을 본뜬 '손톱 조'와 또 다른 손, 특히 오른 손을 나타내는 '우'자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랑 애(愛)'가 정말로 '받을 수(受)'자에 '마음 심(心)'이 가운데 끼어든 형태라면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는 해석이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 바대로 '설문해자'에 바탕을 둔 '중문자보'라는 문헌은 그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져올 치'자가 빠진 고어형에도 '목메일 기'자가 명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마음 심'도 나중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고어형의 일부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덧붙여진 것은 '마음 심'이 아니라 '뒤져올 치'자였던 것이지요.

애(愛)자와 수(受)자는 오늘날에는 일부 유사성을 보이고 있지만 고어형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점은 애(愛)의 부수가 심(心)인 반면에 수(受)자의 부수는 조(爪)라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두 글자가 계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록 오늘날 애(愛)자의 위아래 부분이 수(受)자의 위아래 부분과 비슷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각각은 서로 다른 글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애(愛)자의 윗부분은 '목메일 기'인 반면에 수(受)자의 윗부분은 '손톱 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愛)자의 아랫부분은 '뒤져올 치'자인 반면에 수(受)자의 아랫부분은 '또 우'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문헌 증거로 볼 때 '사랑 애(愛)'가 '손톱 조 + 마음 심 + 또 우'의 합자라는 그 독자의 주장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습니다.

물론 설문해자를 쓴 슈우셴(許愼)의 주장이 틀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걸 검증해 보려면 설문해자 이전의 고어형태, 즉 주로 갑골문들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독자도 갑골문을 참고하셨다고 언급하셨습니다만, 자세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수(受)자의 갑골문 형태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어서 논점이 흐려졌습니다. 애(愛)자의 갑골문을 조사해 보면 아마도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애(愛)의 고어형에는 '뒤져올 치'자가 없이 그냥 '목메일 기'와 '마음 심'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독자나 혹은 다른 어떤 분이라도 사랑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라거나 '짜릿하고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거의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나 혹은 생각 없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이 글을 통해서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였을 뿐입니다. 문헌에 나오는 파자해를 근거로 한자문화권의 사랑(愛) 개념은 어원적으로 '힘들고 괴로워도 참는 것'이었다는 점을 밝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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