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에는 '딸'이 없다

그나마 女를 '딸'로 쓰는 것은 '전주(轉注)'의 방법을 활용한 것

등록 2002.05.12 10:51수정 2002.05.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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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에는 '딸'을 가리키는 말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자의 수는 수만 자에 이릅니다. 제가 가진 자전에만도 1만8천자가 수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딸'을 일차적인 뜻으로 갖는 한자가 없습니다.

어떤 언어든지 가족관계를 가리키는 말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필수적인 낱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같은 낱말을 갖지 않은 언어는 대단히 드뭅니다. 그런데 한자 중에는 아버지(父), 어머니(母), 아들(子)을 가리키는 글자는 있어도 '딸'을 가리키는 글자는 없습니다.


한자는 헬라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 함께 고대 문화를 일군 문명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고대어들은 모두 '딸'이라는 낱말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고대 헬라어에는 '쑤가테어,' 라틴어에는 '필리아,' 산스크리트어에는 '두히타'라는 말의 일차적인 뜻이 바로 '딸'입니다. 도터(daughter)라는 영어 낱말도 사실은 산스크리트어의 두히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한자에는 '딸'을 일차 의미로 가진 한자가 없습니다. 물론 여(女)자를 '딸'이라는 뜻으로 전용해서 쓰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女)의 일차적인 뜻은 '계집'입니다. 모든 여자를 통틀어 가리키는 글자입니다. '딸'을 가리키기 위해 다른 글자를 전용했다는 것 자체가 '딸'을 가리키는 다른 글자가 없었다는 증거이겠습니다.

한자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자적인 민족어를 가진 한국과 일본에도 '딸'이라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딸'이라고 하지요. '아들'과 대비되는 대등한 개념이요 말입니다.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딸'보다 '아들'에게 무게를 두는 일은 있었어도 '개념'의 위상 자체는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일본에도 '무쑤메'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집 낭(娘)자를 쓰기도 하지만 이를 '무쑤메'라고 읽습니다. 무쑤메는 娘의 훈독이므로 훈으로서의 무쑤메가 따로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쑤메는 아들을 가리키는 '무수꼬'와는 대비되면서도 대등한 개념입니다.

한자는 7천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3천5백여 년 전에는 이미 완결된 문자체계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자를 만들거나 뜻을 붙이는 데에는 여섯가지 원리가 사용됐습니다. 그 원리들은 흔히 육서(六書)라고 불립니다.


구체적인 기본 개념들은 주로 상형자(象形字)로, 추상적인 기본 개념들은 지사자(指事字)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로 상형자나 지사자가 둘 이상 합쳐져서 회의자(會意字)와 형성자(形聲字)를 구성했습니다. 회의자(會意字)는 기본자들의 뜻만을 취해서 만든 글자이고 형성자(形聲字)는 둘 이상의 글자를 합하되 그 중의 하나는 소리를 딴 경우입니다.

더 후대에는 위의 네 가지 원리로 만들어진 글자들이 가리키지 못하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내지 않고, 기존 한자의 뜻을 확대하거나 축소하거나 혹은 다른 글자의 뜻이나 소리를 빌려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자의 운용방식을 전주(轉注)와 가차(假借)라고 했습니다.


전주와 가차는 한자의 제자(制字) 원리가 아니라 운용(運用) 원리입니다. 기존의 한자를 이용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운용 원리는 이미 제자가 마무리된 이후에 한자의 수를 지나치게 늘리지 않기 위해 사용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운용의 원리는 논리적으로는 물론 시간적으로도 제자의 원리보다 후대에 속하겠습니다.

기본 가족관계는 거의 구체적이고 일차적인 개념인 만큼 주로 상형자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들을 가리키는 '자(子)'는 팔 벌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딴 글자이고, 어머니를 가리키는 '모(母)'도 두 유방을 강조해서 본뜬 모습입니다. 계집 '녀(女)'도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은 사람의 모습을 딴 상형자입니다.

아버지를 가리키는 '부(父)'는 상형자로도 볼 수 있고 회의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른손(又)에 막대기를 든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인데 '우(又)'가 상형자이고 '곤'자가 지사자입니다. 상형자와 지사자의 뜻을 합쳐서 만들었으니 회의자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손에 막대기 든 모습'을 한꺼번에 딴 글자라고 하면 상형자로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쨋든 부(父)는 '곧은 원칙으로 (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의 가부장을 뜻했습니다.

할아버지(祖)나 손자(孫)자는 명백한 회의자이고 형(兄)이나 제(弟)도 모두 회의자입니다. 그런 글자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상형자나 지사자보다는 뒤지지만 그래도 주요 가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고안된 글자들입니다.

하지만 '딸'은 다릅니다. 중국 사람들은 한자를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도 주요 가족 구성원인 '딸'에게 독자적인 명칭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미 있던 '녀(女)'를 '딸'이라는 뜻으로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여(女)가 '딸'이라는 뜻으로도 전용된 것은 한자 운용의 원리 중 전주에 해당하겠습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딸' 개념의 위치가 '아들' 개념과 대등했거나 최소한 비슷하기라도 했다면, '子'에 버금가는 방법으로, 즉 상형자나 지사자거나 혹은 적어도 형성자나 회의자로라도 개념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 개념은 독자적인 글자를 갖지 못하고 '전주'의 방법으로 간신히 글자를 부여받았습니다.

물론 요즘 중국어에는 '딸'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습니다. '누얼(女兒),'이라든가 '누하이(女孩)' 혹은 누하이얼(女孩兒)이나 누하이쯔(女孩子) 등으로 씁니다. 그러나 그런 낱말들조차도 하나같이 계집 녀(女)자에게다 아기를 뜻하는 아(兒)자나 해(孩)자를 덧붙여서 씁니다. 말하자면 '여자 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딸'이라는 말을 안 쓰고 '여자아이'라고 쓰는 격입니다.

게다가 우스운 것은 아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해(孩)자는 원래 남자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들 자(子)가 변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보통 '하이쯔(孩子)'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거기도 다시 아들 자(子)가 덧붙었습니다. 그 '하이쯔'에다가 女를 덧붙여서 '누하이쯔'라고 해야 비로서 '여자 아이'가 되는 것이지요.

그나마 아(兒)자는 어원적으로만 보면 성 구분이 없는 글자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직 머리가 여물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 중국 사람들의 어법에 따르면 이 글자조차도 '아들'이 어버이에게 대하여 자신을 말하는 자칭(自稱)으로 주로 쓰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원적으로 성구별이 없는 아(兒) 마저도 어법상으로는 주로 남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됐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는 거의 모든 고대 문명에서 딸보다 아들을 선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기 때문이겠습니다. 각 문명마다 그렇게 되었던 사회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겠습니다만,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그게 곱게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자 문화권에서만큼 지독하게 남아 선호가 시행됐던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딸'에게는 아예 독자적인 낱말, 즉 보통명사를 붙여주는 것마저 거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나마 한자 문화권에 속했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독자적인 '말'이 따로 있었고, 그 말속에는 '아들'과 함께 '딸'을 가리키는 말이 대등하게 존재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오랑캐'였던 사람들이 그 민족어 속에 갖고 있던 '딸'이라는 개념이 유독 한자어에만은 없었던 것이 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중국 사람들은 아직도 '딸'을 가리키기 위해서 '여자 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중국 사람들이 3천5백년 전에 '딸'에게 보통명사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키우는 데는 아들에게와 똑같은 양식이 드는 데도 시집가 버리면 다른 집 노동력이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시집 보낼 때에 재산까지 딸려 보내야 하는 경우에는 제 집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를 끼쳤을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요즘 '딸'들은 보통명사뿐 아니라 고유명사까지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들'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직도 차별의 질곡이 적지 않게 남았지만 '딸'과 '아들'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변한 사회 현실을 서술하고 이해하고 후세에 전하는 데에 자꾸 3천5백 년전의 개념과 서술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참 난감한 일이겠습니다.

한자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한국 개념과 말을 담는 그릇으로 써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조심할 점도 많습니다. 한국말이나 개념, 특히 오늘날 우리가 새로 정립하고자 하는 한국말과 개념에 어긋나는 한자 및 그 개념들을 찬찬히 살펴야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5만 자나 된다는 글자 중에서 '딸'이라는 기본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단 한 글자도 없다면, 그래서 '딸' 대신 '여자'라든가 '여자 아이'라는 말을 써왔다면, 그 나머지가 굉장히 체계적이고 우수한 문자라는 말이 곧이 들리겠습니까?

물론 '딸'이라는 글자 하나가 없다고 해서 한자가 전체적으로 매도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문제가 겨우 그런 정도라면 수만 분의 일의 '오차'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밖에 다른 '개념적 오류'가 없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흡한 상태입니다.

그간 한국 사람들의 한자에 대한 논쟁은 '그게 우리에게 어떻게 유용하냐, 아니냐'에 모아져 왔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해로우냐'거나 '거기에는 논리적, 개념적 오류는 없느냐'는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지요.

한자는 우리에게 '답습'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입니다. 연구란 그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살피는 것입니다. 유익한 점 뿐 아니라 해로운 점도 살펴야 합니다.

한국식 한자는 그냥 내팽개치기에는 그 안에 담긴 것이 너무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끌어안기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개념적 오류'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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