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중국 인민의 발, 자전거의 운명

발전의 뒤안길로 가려져가는 베이징 풍경

등록 2002.05.19 00:29수정 2002.05.2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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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한때 자전거가 '폼나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아직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는 사람 드문 도시의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질러 내달리던 시절에. 그리고 저녁 무렵, 포만감 가득하게 배부른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자전거를 타고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밤거리를 유랑하던 시절에. 그 시절, 자전거는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평화였던 것 같다.

중국에 온 이후 나의 첫 정착지는 톈진이라는 공업도시였다. 지금 살고 있는 베이징에서는 기차로 1시간 30분이 채 안 걸리는 가까운 도시였고, 늘 지저분한 안개가 뿌옇게 서려 있는 환경오염 중증에 걸린 '환자'같은 도시였다.

그러나 나는 이 창백한 환자 같았던 도시, 톈진시절의 기억들과 그 추억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는 중고자전거 시장에서 샀던,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나의 낡은 고물자전거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고물상의 손으로 넘어가 이미 오래 전의 그 모습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때는 그 자전거가 나의 보물단지였다. 톈진은 베이징과는 달리 시내가 작고 아담해서 웬만한 거리는 다 자전거로 움직이기 때문에 거리에는 버스나 택시보다도 자전거 탄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래서 톈진은 직할시라는 도시의 규모와는 달리 버스나 지하철, 택시등의 대중교통 수단이 유난히 낙후되어 있고 생활수준도 같은 급의 다른 대도시에 비해 많이 처져 있는 반면, 자전거 제조기술만큼은 전국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당시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약 2만원 가량을 주고 샀던 그 중고자전거와의 인연은 일 년 반 동안이나 질기게 지속이 되었다. 그 사이 주변에 아는 사람들은 한두 번씩 자전거를 도둑맞았거나 어딘가 심한 고장이 나서 새 자전거로 교체하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의 그 고물자전거는 일 년 반 동안 타이어에 빵구가 나는 잔고장 외에는 멀쩡히 잘도 굴러다니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너무 지겹기도 하고 자꾸만 새자전거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무지 그 고물자전거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그 동안 정이 들기도 해서 쉽사리 팽개치지도 못했다.

그러다 드디어(?) 그것을 매몰차게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지금도 내 오른쪽 무릅 아래에 커다란 상흔을 남기고 있는 그 자전거 사고는 40도가 꼴딱하고 넘어간 한여름의 폭염이 이글거리는 대로 위에서 발생했다.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삼륜자전거를 미처 피할새가 없이, 내 몸은 더운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스팔트 위로 '부웅'하고 낙하해 버린 것이다.

대형사고였다. 반바지를 입은 무릎 아래로는 말할 수 없는 통증과 선혈들이 낭자했고 게다가 주변에서 몰려나온 구경꾼들로 인해 나는 아픔을 느낄새도 없이 허겁지겁 자전거를 '빵차'(面的. 식빵모양으로 생긴 영업용 봉고택시)에 싣고 도망치듯 집으로 와야만 했다.

그 후, 한 달 정도의 지루한 치료기간과 외출제약으로 인해 나는 나의 그 고물자전거를 한 달 가까이 집 앞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아니 잊고 지냈다. 날이 갈수록, 그 사고의 원인이 모두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그 고물자전거 탓인 것만 같아 이 기회에 아예 버리기로 작심을 했었다. 드디어 나도 새자전거를 사려나 싶었다.

그런데, 치료가 얼추 다 끝나고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을 무렵.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드라이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문득 집 앞 어딘가에 열쇠도 채우지 않고 '버려둔' 자전거 생각이 났다. 그런데 신기했던 건 그 고물자전거가 먼지만 둘러쓴 채 그대로 그 자리에 멀쩡하게 서있는 것이었다.

남들은 열쇠를 채워놓아도 밤사이 도둑맞기 일쑤였는데, 제발 '훔쳐가십사'하고 일부러 열쇠도 채워놓지 않은 그 자전거는 도둑맞기는커녕 내가 언젠가는 자기를 다시 찾을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멀쩡한 모습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후로 나는 새 자전거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그 고물자전거와의 질긴 인연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 자전거는 내가 베이징으로 이사를 올 때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삿짐 트럭 뒤에 싣고서 베이징까지 끌고 왔다.

주인과 더불어 그 고물자전거도 '서울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베이징에 와서도 반 년 정도 나의 발이 되어준 그 자전거는 다시 새 집으로 이사를 올 때야 비로소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도저히 타고 다닐 수 없을 만큼 고물이 돼버렸던 까닭이다.

그 고물자전거와 이별한 후,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사고 싶었던 새자전거를 못사고 있다. 톈진과는 달리 자전거를 탈일이 그다지 많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 수단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자전거를 사야겠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다고 한들, 다시는 톈진시절 만큼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행복한 '자전거여행'을 즐길 수도 없을 것 같아서이다. 이제는 그런 여유가 좀체로 없다.

'서양차와 동양차'에서 시작된 13억 인민의 '발'

중국인들에게도 자전거가 한때 '폼나던'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와 버스 등이 보편적인 교통수단이 되기전까지만 해도 자전거는 중국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교통수단이었다. 베이징 거리에 자전거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인 청나라 광서제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도, 그가 자전거타기를 좋아해서 자금성 내의 많은 문턱들을 없애버리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등장한 자전거는 1920-30년대 무렵부터는 서서히 장안의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유행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수입된 자전거들이었다고 한다. 수입자전거가 대부분이다보니 그 당시에는 자전거를 어디에서 수입한것이냐에 따라 '서양차'와 '동양차'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자전거가 본격적으로 서민들의 '발'이 되었던 시대는 그후로도 한참 뒤인 1970년대 무렵이다. 신중국이 막 성립되고 난 직후인 50-60년대까지만 해도 자전거는 모든 인민들의 발이 되지는 못했다. 당시 인민들의 생활 수준에 비해 자전거 가격이 워낙에 비쌌던 까닭이다. 때문에 그 당시 자전거는 새 신부가 장만해가는 중요한 혼수용품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정도였다.

중국의 50-60년대 시절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 사진관의 그림을 배경으로 자전거와 함께 한껏 폼잡고 찍은 사진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자전거가 당시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폼나는' 물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일어난 '은륜의 물결'은 중국을 세계적인 자전거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자전거 산업의 붐과 생산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이중에서도 특히 톈진에서 만든 자전거는 중국 전역에서도 가장 튼튼하고 질이 좋은 자전거로 유명해졌다. 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자연히 제품의 질도 우수해지기 마련이다.

자전거가 13억 인민들의 '발'이 된 이후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바로 자전거 주차 풍경이다. 지금은 베이징이든 톈진이든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자전거 전용 도로와 주차장을 볼 수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자전거 전용 주차장에 자전거를 주차할 시에는 일정한 '주차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과 회사 앞에 주차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자전거주차 구역에서 이러한 요금을 받고 있다. 또한 아직까지 자동차보다는 자전거가 더 보편적인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보니 자동차 주차장보다 자전거 주차장을 더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자전거가 많아질수록 자전거 도둑들도 극성을 부리게 되고 밤사이 자전거를 도둑맞았다는 이야기들도 자주 듣게 된다. 자동차와는 달리 자전거는 한번 도둑을 맞으면 찾을 길이 없는지라, 도둑맞은 주인들은 그저 꼼짝없이, 다시 도둑맞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살 수밖에 없다.

자전거가 없으면 다음날 출근길부터 당장, 느려터지고 미어터지는 끔직한 만원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베이징 등의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직장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자전거가 없으면 이렇게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 자전거도둑에 대해 무대책일 수밖에 없었던 중국사람들에게 최근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시정부에서 자전거 번호판제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톈진시 같은 경우는 이미 2000년도말부터 자전거번호판제를 실시하기 시작했고 베이징시는 올초부터 이것을 시행하고 있는데, 즉 새 자전거든 헌 자전거든 모두 번호판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번호판을 부여받은 모든 자전거들은 컴퓨터로 전산관리가 가능하게 되어서 도둑맞을 위험도 적을 뿐더러 자전거번호판만 입력하면 그 주인의 신상명세도 나오는 지라 치안문제 해결에도 여러 모로 유리하다는 논리이다.

자전거 도둑들에게는 서운한 일이겠지만, 일반사람들에게는 보다 안심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제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전거 도둑이 영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문짝'과 튼튼한 '열쇠'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어디 도둑들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베이징시는 이러한 자전거번호판제와 더불어 일 년에 4위안이라는 자전거세금 납부방침도 확정해서 올해 4월부터 시행을 하고 있다. 이제는 자전거도 공짜로 탈 수 있는 시대가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동차들이 늘어나다보니 길은 넓혀야 하는데 원래 있던 자전거 도로를 좁히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머리를 쓴다고 내놓은 정책이 바로 자전거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공해는 일으키지 않지만 도로를 점용하는 만큼 국가에 세금을 내라는 뜻이다. 바야흐로 중국에서 자전거가 기를 펼 수 있는 시대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자전거번호판제나 자전거세금제의 도입등 자전거와 관련된 각종 현대적인 정책들이 입안되는 것과 동시에 중국에서 자전거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인민적'이면서도 '평등'한 교통수단이라는 의미도 갈수록 퇴색되어가는 느낌이다.

이제는 돈만 있으면 최신형 모터사이클 등을 사서 페달을 밟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도로 위를 붕붕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귀찮거나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전거보다는 자동차를 더 사고 싶어한다. 지금, 중국에서 자전거는 더 이상 평등의 상징이 아니라 빈부격차를 확인시켜주는 '바퀴'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물자전거와 이별한 후 내가 다시는 자전거를 사지도 타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후 가끔씩이나마 아침저녁으로 느끼곤 했던 일상의 작은 위안과 평화들을 잃어버린 것처럼, 중국인들도 최근에 몰아치는 '발전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도리'라는 속도전의 혁명 속에서 차츰 자전거에 대한 추억을 잃어가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마치 베이징의 왕푸징거리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전거 주차요금을 받고 있는 요금징수원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없고 정나미 떨어지는 일이다. 또 절로 씁쓸함이 느껴지는 삶의 풍경이기도 하다.

'길이 있는 곳에는 항상 자전거가 있는' 중국. 그리고 베이징의 길거리에서 예전처럼 행복한 자전거 타기를 할 수 있는 시절이 과연 다시 올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바이시클라이프'에 게재되었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바이시클라이프'에 게재되었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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