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중학교 입학 그리고 두 달

<귀농일기> 실상사 작은학교의 '실상교육'

등록 2002.05.21 03:16수정 2002.05.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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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이니 대체의학이니 하는 이야기가 의식 있는 사람들의 주요한 화제가 된 지 오래다. 요즘 들어서는 명상이나 공동체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씩은 할 줄 알아야 어디 가서 말마디라도 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 분별심과 명상심의 조화가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개중에 대안교육과 대안학교가 단연 관심의 으뜸이다. 고전적인 썸머힐 학교에서부터 홈스쿨과 발도로프 교육에 이르기까지 입달린 사람들은 다들 교육전문가들이다.


1박 2일의 축제 한마당

그렇다고 대 놓고 내가 우리 애를 대안학교 보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대안적 삶의 모델에 대한 자본화 비판이 있어서일까? 특수 엘리트주의라는 시선이 맘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비가 너무 비싸서 일까? 대단한 용기고 대단한 결단을 했다고 면전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듣기가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지난 주 토요일에 '실상사 작은학교'에서는 학교 구성원 모두가 모인 가운데 1박2일로 축제가 열렸다. 우리 새날이가 대안 중학교로 진학한지 두 달되는 때다. 26명의 전교생과 50여 명의 학부모. 9분의 선생님. 언니나 누나, 오빠나 형을 보러온 동생들까지 근 100여 명이 함께 어울린 이 행사는 대안학교 두 달에 대해 가늠해보는 자리가 되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번 행사가 내게는 학교에 대한 믿음과 학부모에 대한 연대감이 든든하게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집단이 이틀 동안 이 정도의 일치와 믿음을 이루어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동안 학교라는 곳이 선생 눈치를 안 볼 수도 없고 선생과 학교당국에 대한 불신을 감출 수도 없는 그런 관계였음을 고백한다. 믿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동의를 표시해야 하는 난처함. 학교와 학부모는 서로 그랬었다고 본다.

금세 동기간처럼 서로 어울리다.


이번 행사에서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우리 새날이를 비롯하여 이곳의 여학생들과 여선생들이 면생리대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새날이가 다른 두 아이와 함께 사는 '우아암'이라는 작은 가정에 갔다가 곱게 빤 새하얀 면 생리대가 아이 기저귀처럼 빨랫줄에 널려 있는 걸 보는 순간 감동스럽기까지 했다면 이해가 될는지.

환경에 대한 거대담론보다 이런 작은 실천이 내 눈에는 환경문제의 대안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이 감동은 내가 돌아와서 우리 지역의 한 여성환경단체에 실무자로 있는 여자후배에게 면생리대 운동을 권했을 정도이다.


다들 대안학교를 선택한,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하는' 학부모라는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표출될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만의 기우에 불과했다. 부모들은 오랜 동기간처럼 사이좋게 어울렸다. 아빠들은 금세 친해져서 형님 동생 했고 엄마들은 언니 동생 했다.

엄마들과 아빠들 사이는 오빠 누나라는 호칭은 아마 영원히 등장하지 않고 그냥 누구네 엄마 누구네 아빠로 통용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형부와 누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한 것을 목격했다. 참 대단한 친화력들이 아닐 수 없다.

대안학교에 대한 기대와 염려

부모들은 다들 재담가였고 재주꾼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기보다 맘이 통하고 서로 의지하는 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축구 혼합경기에서 1학년 최정호 부자가 서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정호야' '아빠야'하며 드리볼을 할 때는 새날이가 아들이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난생 처음 아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 대한 인상이 그랬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노작교육과 운동으로 거무스레하게 볕에 그을려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노루새끼처럼 날쌔고 건강해 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학생들은 지리산의 들짐승들 같았다.

첫날인 토요일 저녁에는 전교생과 학부모가 함께 하는 가요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기획하고 연출한 무대였다. 2학년 선배들은 확실히 노는 풍이 달랐다. 대안학교에서의 1년이라는 차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게 엿보였다. 2학년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웠고 당당했다. 오빠나 언니들이 그렇게 신입생들을 잘 챙겨주고 보살핀다는 새날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동아리는 김광석의 노래만 세 곡을 불렀다. 뮤지컬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가면극을 하는 팀도 있었다. 규격과 형식에 전혀 매이지 않은 즐거움이 넘치는 그들의 무대였다. 실수를 해도 싱글벙글했다. 객석의 아이들은 우정어린 야유와 환호를 내내 내질렀다.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이것저것 먹을거리들을 가져오셔서 나눠 먹었다. 진안에서 농사짓는 분은 찰떡을 만들어 시루채 들고 오셨다. 떡방아를 찧지 않고 불린 찹쌀과 팥을 켜켜이 놓고 찐 것인데 서로들 떡 시루에 달라붙어 뜯어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틀 동안 먹어도 남았다. 인스턴트 음식이나 청량음료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과일도 유기농 과일을 누가 가져왔다. 바빠서 그랬다는 내 빈손이 부끄러웠다.

마지막 순서는 학년별로 학부모와 담임선생님이 평소의 관심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이의 생활과 성장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게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담임인 연동진 선생님이 준비한 순서는 이러했다.

1. 이제까지의 교사-학부모 만남, 작은 가요제, 체육대회를 해 보고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곳에 도착할 때의 마음과 순서가 진행될 때 당시의 기분, 끝낸 지금의 마음을 비교하면서 나누도록 합니다.

2. 아이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사건 중심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3. 아이를 실상사 작은 학교에 보낸 후 학부모나 학부모 가정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

4. 학교를 지켜보면서 우려되는 점과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나눕시다. 이유나 분석은 하지 않고 간결하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형제나 부모를 잘 챙기는 모습이 전과 다르다는 부모도 있었고 집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왜 이리 먹을 게 많으냐고 의아해 하는 모습이 도리어 의아했다는 학부모도 있었다. 자립심이 커지고 동생과 싸우는 양상이 엄청 개선되었다는 말은 내가 한 말이다.

한 마디로 두 달 사이에 아이가 놀랄 정도로 성숙했다는 느낌을 모든 부모가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난데없이 '뒷산이 작아 보인다'고 한 아이도 있었나 보다. 맨날 지리산 천왕봉만 보니 눈이 높아진 모양이라고 박장대소하였다.

부모와 학생 그리고 선생과 지역사회가 함께

너나없이 부모들이 한 말이 있다.
아이들이 집에 와서는 집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며 부모님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새날이가 그랬다. 운동화 빨아주고 쑥갓 뜯어다 나물 무치고 날씨가 흐리면 집으로 달려와 속옷 빨래부터 걷어주고 이런 걸 그 동안 엄마아빠가 다 해 주셨구나 싶어서 눈물이 다 나왔다고 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찬물에 쌀을 씻으면서, 친구 생일에 덥석 케이크나 학용품을 선물로 준비 할 수 없으니까 붓글씨나 인형을 며칠 동안에 걸쳐 준비하면서 그 동안은 친구 생일까지 결국 엄마아빠가 챙겨 주셨구나 싶어서 너무 고맙다고 몇 번이나 그랬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 열 세 명 하나하나를 부모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하나하나에 대해 버릇과 심리상태까지 소상하게 말씀하실 때마다 부모들은 놀라면서 감탄을 했다. 어떤 아이는 더 사랑스럽고 어떤 아이는 더 힘들다라는 게 내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담임인 자신의 변화인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제 갓 30대에 접어 든 이 총각선생님은 드문 통찰과 포용을 항상 보여 주시는 분이다.

헤어져 돌아와야 하는 시간.
짐을 챙기러 새날이네 작은 가정 '우아암'에 갔다. 새날이랑 산하랑 혜정이가 우아암 담당 여선생님에게 혼나고 있었다. 이제 갓 24세의 여선생님은 키는 우리 새날이하고 엇비슷하고 얼굴은 유난히 앳된 선생님이다. 애들이 상기된 채 뭐라뭐라 항변을 하고 선생님은 동네 언니처럼 막 추궁을 하는 장면이 누가 학생이고 누가 선생인지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안 들킬 겸 나는 슬그머니 우아암을 빠져나와서 대문 밖에서 선생님의 꾸중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털썩 주저앉아 체육대회로 무거워진 다리를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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