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언제나 배가 고픈 아이 같애"

<시와 아이들> '밤은 저 빛들이 얼마나 아플까?'

등록 2002.05.22 22:10수정 2002.05.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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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표정이 밝고 구김살 없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딘지 얼굴에서 그늘이 느껴지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이나 어둠은 열이면 아홉, 그 뿌리가 가정에 잇대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림(가명)이도 그런 아이 중 하나입니다. 생모의 가출 이후 집보다는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차츰 거리의 아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 가출에서 돌아온 서림이는 제 담임인 미술교사 이 화백과 제 자리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어둡지만 어딘지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컴퓨터에서 시를 꺼내어 손을 보고 있는 장면하며, 그런 저를 가만 쳐다보고 있는 그 아이의 까만 동자까지, 두 번째 가출에서 돌아온 그날의 상황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저는 한 순간 과거와 현재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착각상태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서림아, 너 이번이 두 번째냐 세 번째냐?"
듣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잦은 가출을 나무라는 선생님의 비아냥거림이 분명했지만, 그런 뜻으로 던진 물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서림이는 그런 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까만 동자만을 제게 고정시켜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너 지난번에 선생님하고 시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니?"
물음이 바뀌어진 것은 비아냥거림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 스스로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확실히 해두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림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바람은 공기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공기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때 선생님이 쓰신 시의 첫 구절 맞죠?"
제가 놀란 것은 결코 서림이의 기억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놀람은, 아니 저의 감격은 그날 두 번째 가출에서 돌아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집을 나가버린 아이가 어느 틈에 두 줄의 시구를 제 이마에 새길 수 있었는가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이 시를 설명 없이도 이해하는 아이는 너뿐이었지. 그런데 네가 없어져 버린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니?"

서림이가 두 번째 가출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막 탈고를 끝낸 그 시를 출력하여 며칠 전 시에서 주최한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온 아이에게 그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시를 받아든 아이의 눈동자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어떤 물결 같은 것이 그의 까만 동자를 흔들어주기만을 간절히 고대했지만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의 요구에 의하여 시를 분석하고 해석해주기 전까지는.


그날, 저는 쓸쓸한 기분이 되어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켰고, 그 문제의 시를 다시 꺼내어 그 아이가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잘못인지 독자의 잘못인지를 한참동안 따지고 있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저를 가만 쳐다보고 있는 서림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어둡지만 맑은 총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그 아이에게 저는 다짜고짜 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너, 선생님의 설명 없이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있겠니?"
그런데 발이 저린 듯한 표정이 얼굴에서 차츰 지워지면서 까만 동자에 물결이 일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아이의 입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온 말은 이랬습니다.
"시가 느껴져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림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 속에는 결핍이라든가, 가난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이 출몰하고 있었습니다. 서림이에게 몇 편의 시를 더 보여주면서 시를 쓰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말해주다가 그리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내적인 충만감보다는 오히려 어떤 결핍감 때문이 아닌가 싶어. 너 혹시 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want가 결핍이라는 명사로도 쓰인다는 거, 알고 있니?"


"예.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해주신 거 기억나요. 부족함이 없으면 원하는 마음도 없을 거라고 그러셨어요. 저는 그날 선생님 말씀을 듣고 정말 그런지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했어요."

"그럼 진수성찬 앞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겠네?"
"그럼요. 잔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라면을 3인분씩이나 먹어버린 사람이죠. 맞죠?"

"맞아. 잔치상 앞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이미 배가 부른 사람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서림아, 넌 언제나 배가 고파 있는 아이 같애."

그 말에 말없이 저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 아이의 눈빛에서 뭔가 가능성 같은 것을 발견했다고 여겼는데,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한 듯 서림이는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세 번째 가출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그 아이에 대한 서운함 이상의 감정을 이 화백을 만나 풀고 있었습니다. 교사보다는 시인과 화가의 입장에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종내는 서림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서림이가 공기의 흔들림을 이해하는 것은 제 삶 속에서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는 징조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흔들림의 체험이 서림이로 하여금 시를 이해하게 만든 셈이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색채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기도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서림이의 시적 감수성도 결국 상처의 선물인 셈이네요."

"서림이는 마치 어둠 속에 밝음이 있는 아이 같아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말이죠. 빛나기 위해서는 얼마 만큼의 어둠도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다음 차례에 그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얼른 눈치로 보아서는 화가가 아닌 담임교사의 입장으로 돌아가 있는 듯했습니다. 예술도 좋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한 아이가 상처 없이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그런 심정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의 침묵에 압도되어 하릴없이 창 밖 어둠과 그 어둠을 밝히고 있는 불빛들을 가만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밤은 저 빛들이 얼마나 아플까?"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말에 놀란 것은 이 화백보다는 제 자신이었습니다. 이 화백은 다만, 무슨 뜻인지를 눈으로만 제게 묻고 있었습니다.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최근에 읽은 시의 한 구절입니다. 그 시인은 밤에 불을 켤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밤중에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아플까봐서 말이죠. 여류 시인다운 예쁜 엄살이나 시적 상상력으로만 스쳐버리기엔 가슴에 와 닿은 바가 너무 컸어요. 어떤 깊은 연민이나 이해도 없이 아이들의 어둠에 강한 도덕적인 빛만을 들이댄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아플까요?"

시인이나 화가나 음악가보다도 더 예술적 감각이 요구되는 직업이 교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예술이 창작이라면 사람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최상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생명과 역사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런 예술적 감각과 함께 그를 사랑하는 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후 2년이 흘러 지금 서림이는 3학년 졸업반입니다. 3년 동안 한 번도 담임이 되어주지 않았다고 저를 마구 때린 적도 있습니다. 그런 행복한 구타는 당해볼 만합니다. 이제는 3학년이 되어서인지 학교 생활도 어느 정도 잘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아이의 얼굴에서 그늘이 다 거두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돌아가 마음을 내려놓을 안식처인 집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집을 스스로 지어보라고 저는 서림이에게 말해주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 아이의 까만 눈이 조금은 슬퍼 보이지만 예전처럼 불행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내면의 표정은 더 찬란해 보입니다. 그 찬란함은 흔들림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람은 공기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공기가 흔들리는 것이다
여름은 찬란하였다, 너의 흔들림으로 인하여
귀때기가 파래지도록 너를 치고 간 바람으로 인하여
가을이 오자, 너는 물들기 시작했다
네 안의 흔들림으로 인하여

-졸시, '나는 흔들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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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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