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노동을 부끄러워하는 나라에 사는 아이들

등록 2002.05.29 13:28수정 2002.06.0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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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난 뒤 잠깐 쉬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1학기 대학 수시 모집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있는데, 몇 달 후면 반도체 회사로 현장 실습을 떠나게 될 진옥이가 취업 서류 문제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 주민등록등본 떼러 가야하는데요."
"응? 오늘이 마감인데 미리 좀 해놓지 않고."
"죄송해요. 금방 다녀올게요."

저는 외출증을 끊어서 그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꾸중을 상큼하게 받아넘기는 모습하며 외출증을 건네 받는 다소곳한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습니다. 저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서 그랬는지 문득 며칠 전의 일이 영상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날도 진옥이는 현장 실습 문제로 교무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말이 현장실습이지 수습기간만 지나면 적지 않은 급료가 보장되는 정식 입사나 다름 없어서 이런 저런 조건들을 재면서 고민하다가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학교로 취업 성격을 띤 현장실습 의뢰를 해온 업체들은 경기도나 충청도에 공장을 둔 생산직 반도체 회사가 대부분이었고, 서울에 소재한 백화점이 한 두 곳 끼어 있었습니다. 반도체 회사는 백화점에 비해 급료가 높았고 기숙사 시설도 완비되어 있어서 서울에 연고가 없는 아이들은 열이면 아홉 반도체 회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옥이는 달랐습니다.

"선생님, 저 백화점으로 정했어요."
"너,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다며?"
"그래도 반도체 회사는 싫어요."
"왜?"
"거기는 공장이잖아요."
"공장이 어때서?"
"전 공순이가 되는 것은 싫어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처음에는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공부를 제법 하는 아이들이 가정 환경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거나 잠시 뒤로 미루고 반도체 회사 입사를 희망한 것과 비교가 되어 조금은 미운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습니다.


"공순이라는 말이 어딨어? 엄연한 생산직 노동자야. 그리고 지금은 그런 말 쓰지도 않아. 왜 너 혼자 그런 비뚤어진 생각을 해?"

그러자 그 아이는 얼굴을 똑 바로 들고, 조금은 공격적으로, 전혀 뜻밖의 질문을 제게 던졌습니다.
"그럼 선생님 아들이 대학을 나왔는데 공장에 다니는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면 허락하시겠어요?"


서로 흥분된 말이 오고가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잠시 그 아이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불과 1초도 될까말까한 짧은 시간이었기에 제 대답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셈이 되었습니다.

"당연하지, 사람이 진실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우리 아들이 원하는 여자라면."

그런데 그렇게 자신 있게 말을 해놓고는 어딘지 뒤가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머리 속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야 좀 별난 면이 있어서 그렇다 치고, 아내는 어떨까? 아내는 과연 공장 생산직 근로자인 고졸 출신 여성과의 결혼을 허락할까? 아들의 여자가 고졸 출신 공장 근로자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결혼을 반대한다면 나는 아내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그런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 아이가 제게 던진 마지막 말은 이랬습니다. 이번에는 다소 방어적으로.
"선생님, 그래도 세상은 그렇지 않잖아요."

진옥이를 보내놓고 저는 불편한 오후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앞이라 어려워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 다른 아이들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수업 시간이면 샛별 같은 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던 한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히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는 학기초 첫 면담 때 자신의 진로를 취업으로 명확히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그의 성적과 학업에 대한 열정이 너무 아쉬워 진학에도 뜻을 두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종례 시간을 앞두고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하면서 저는 문득 몇 해 전에 저를 찾아온 한 학부형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해 2월이었습니다. 종업식을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고 한아름의 꽃을 안고 저를 찾아온 그분은 주란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주란이는 이름만큼이나 얼굴도 마음도 예쁜 아이였습니다. 학업 성적도 우수했고 예의도 바르고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곱디고운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4월 쪽지 면담을 할 때 그에게 받은 편지에는 뜻밖에도 이런 내용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저를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혹시 해서 드려보는 말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구요.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곧바로 이런 답장을 써서 다음 날 그 아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너처럼 착하고 고운 아이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다만,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사실은 널 자주 바라보지는 못했단다. 자꾸만 너를 바라보고 싶어질까 봐서 말이지. 혹시라도 아이들에게 편애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그래서 네가 조금 손해를 보고 있기는 할거야.'

그 후 주란이는 저와 눈이 자주 마주쳤습니다. 그럴 때마다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눈웃음 보이고는 재빨리 제 쪽에서 먼저 눈을 떨구곤 하였습니다. 담임의 관심과 사랑에 더없이 행복해 하면서도 어느 만큼 거리를 둔 채 저를 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그 아이 특유의 겸손함으로 보이기도 했고, 조금은 자신감이 없는 아이의 소심함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날 주란이 어머니는 해를 넘기고 2월이 되어서야 늦게 저를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주란이가 실업계에 들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애 아빠도 저도 속이 많이 상하고 솔직히 남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 얘기를 많이 하고 해서 늦게나마 찾아 뵙게 되었네요. 그 동안 신경을 못써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학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잠깐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릴 만큼 흥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꽃을 들고 찾아오신 고마운 학부형에게 다소 격양된 어조로 훈계나 다름없는 말을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따님에게는 큰 잘못을 하신 것 같습니다. 주란이는 귀한 것을 많이 가진 아주 훌륭한 아이입니다. 다만, 인문계 아이들에 비해 영어나 수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질 뿐입니다. 그것은 주란이가 가진 다른 많은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결함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조차 주란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주란이의 삶 전체를 부끄러워하셨습니다. 전 그것이 너무 속상합니다."

그날 주란이 어머니는 저에게 꾸중을 들은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이 매우 밝아 보였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면서 청소를 마치고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끝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향해 저는 무슨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이 누구죠?"
"이순신 장군입니다."
"이순신 장군 혼자 만들었나요?"
"……??"

아이들이 서로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자 제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거북선을 직접 만든 사람들은 노동자들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의 아이디어만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는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도체를 직접 만들어 수출하는 사람들은 박사들이 아닙니다. 생산직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의 위대한 손입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의 손이고, 이번에 반도체 회사로 현장 실습을 떠나는 바로 여러분들의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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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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