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복이 많으신 어머니

등록 2002.05.25 06:57수정 2002.05.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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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엔 또 모처럼 만에 백화산엘 올랐습니다. 최근에 자주 흠뻑 내린 비로 온 산의 수풀이 금세 무성해져서 와글와글 힘차게 몸싸움을 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아카시아 향기가 온 산에 꽉 차 있는 것 같더군요.


신선하고도 감미로운 아카시아 향내를 맡는 순간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충격 속에서 한 순간은 정신이 몽롱해지며,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요. 아카시아 향내 하나에도 눈물이 핑 도는 가슴 구조를 지니고 있는 내가 이 부박한 세상을 그런 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스스로 용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신록의 계절임을 실감시켜 주고 있는 5월의 훈향 속에서 여러 가지 즐거웠던 일들이 있었지요. 생각하면 너무 빠르게 지난 것 같은데, 우리네 인생 자체가 '찰나'이니 그 모든 일 또한 찰나일 수밖에….

지난 16일엔 우리 두 형제 가족이 어머니를 모시고 안면도 세계꽃박람회를 구경했지요. 이 행사에는 특별히 두 분을 더 모셨는데, 내 동생의 장인 장모님이었습니다. 같은 태안에서 사시는 두 분은 이미 꽃박람회를 보셨지만, 우리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서 모시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 어머니의 뜻이기도 했지요.

혼잡한 시간을 피해 우리 가족은 오후 4시경에 갔는데 그 의도가 적중해서 비교적 주차도 수월했고, 관람장마다 길게 줄을 서지 않고 손쉽게 입장할 수가 있었답니다. 2시간 30분 동안 거의 모든 관람장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평소 꽃과 수목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누구보다도 좋아하시는 것 같았지요.

우리 가족 행사에 동생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는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도 종종 이런 풍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안면도 꽃지와 방포 중간 지점에 있는 한 생선횟집에서의 저녁 식사 자리는 더욱 즐거운 풍경이었고….


19일 우리 가족은 또 한번 안면도 꽃박람회장엘 갔습니다. 이 날은 '성령강림대축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좋은 날이고, '석가탄신일'로 불교 신자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날이었지요. 나는 올해의 성령강림일과 석탄일이 5.16과 5.17 ―우중충한 날들과 겹치지 않은 것을 연초부터 눈여겨보았지요. 아무튼 그야말로 '좋은 날'인 19일은 안면도 세계꽃박람회의 폐막일이기도 해서 오후부터는 무료 입장이라 우리 가족은 쉽게 재 관람 결정을 할 수가 있었답니다.

이번에는 지난 16일 관람을 하지 못했던 휴양림의 '수목원' 쪽으로 가서 그 넓은 땅을 고루 돌아다니며 온갖 수목과 꽃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가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즐거운 것은 팔순이 다 되신 내 노모께서 산길을 오르내리고 긴 걸음을 하면서도 별로 힘들어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해 대장암 수술 전에는 숨이 가빠서 성당 언덕을 오르는 데도 두세 번씩 쉬어야 했는데….

전국의 모든 차가 안면도로 몰린 듯 안면도를 빠져나오는 일은 적잖이 고생스러웠지요. 내 평생에 우리 고장의 한 곳인 안면도의 길바닥 위에서 그렇게 오래 지체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습니다. 안면도 꽃박람회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유형 무형의 온갖 불편을 겪은 안면도 주민들의 원성이 절로 실감되는 기분이었지요.

그날 저녁부터 어머니는 식사를 하시지 않고 장 청소를 위한 약물을 마시기 시작했지요. 대전성모병원에 가서 장 내시경 검사를 받을 일이 다음날 오후 2시로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장 청소를 위한 약물을 계속 마시며 깊은 밤에도 자주 화장실을 가시는 노친네를 보자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절로 한숨이 나오고 걱정도 한량없었습니다. 이번의 검사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작년 가을의 대장암 수술로 대장의 절반을 잃은 어머니는 아직도 '설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설사를 하지 않는 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설사를 하는 형편이고, 심한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니 그것만으로도 보통 고생이 아닐 터였습니다.

수술 후 한동안은 항암제와 면역증강제를 매일 세 번씩 복용을 했지요. 그러다가 지난 2월 검진 이후부터는 처방전에서 면역증강제가 빠지더군요. 지난 2월의, 장 내시경 검사를 제외한 종합 검진 결과는 양호한 편이었지요. 다만 변에 약간의 피가 섞여 나오는 것 때문에 변 검사를 다시 했지요. 역시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 확실해서 이번에 다시 초음파 검사, 피 검사, X레이 검사와 함께 장 내시경 검사를 하게 된 거지요.

막내 동생이 대전에서 살고 있음에도, 거의 매월 대전성모병원에 가서 주치의께 어머니의 상태를 얘기하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약을 타오곤 했던 나는 이 달에는 또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20일 아침 8시경 집을 출발하는데, 어머니는 검은 비닐 봉지를 여러 장 준비해 가지고 내 승합차에 오르시더군요. 역시 차안에서도 장 청소를 위한 약물을 마시는 어머니는 달리는 차안에서 두어 번 용변을 보시더군요. 적당한 크기의 플라스틱 쓰레기통 안에다 비닐 봉지를 넣어 씌우고….

차안 백미러를 통해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내가 승합차를 가지고 있음을 크게 다행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대처의 큰 병원에 갈 수 있는 내 처지를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6년 전 내 아버지께서 간경화라는 병고를 치르며 돌아가실 때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그 눈물겹던 상황도 절로 떠올라 회한의 한숨이 나왔고….

한 달에 한 번씩 대전성모병원을 다녀오는 일도 좋고 이런 일 저런 일 다 좋으니 그저 어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안양의 누님, 자주 국제 전화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미국 LA의 누이들, 아침에 우리 집에 와서 자동차 연료비로 쓰라며 봉투를 놓고 간 가운데 제수씨…. 모든 형제들의 그런 모습들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깊은 효성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외로, 우리 형제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도 나는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전 11시경 병원에 도착해서 우선 검사실에서 피를 뽑고, 초음파 검사를 한 다음 X레이 촬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지난해 수술 전의 내시경 검사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머니는 여러 가지로 힘이 많이 드셨던 모양입니다. 검사를 마쳤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지요. 한참 쉬었다가 병원 근처 음식점에서 요기를 한 다음 4시경 둔산동의 동생네 집으로 갔습니다.

금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출·퇴근을 하는 동생 부부는 퇴근을 서두른 기색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이번의 대전행에 대비하여 미리 미리 마련해 놓았다가 가지고 온 열무김치와 마늘쫑볶음 멸치볶음 따위를 받으며 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머니를 근처의 '영양탕' 집으로 모셨습니다. 동생이 전에도 한번 어머니를 모신 적이 있는 집인데,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맛이 썩 좋아서, 어머니는 지금까지 먹어본 고기 중에서 제일 맛있다는 말씀도 하시며 아주 잘 자셨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잡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비록 질긴 가난 속에서 고생을 하 많이 하며 사셨지만, 그리고 여러 번 크게 병고를 겪으셨지만 자식들을 여럿 두신 덕에 즐거운 일도 많으니, '그래도 복이 많으신 분'이라는 생각….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어머니께 넌지시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제오늘 또 한차례 고생을 허셨지먼, 이렇게 대전에서 사는 아들 덕두 보구, 어머니 마음이 그렇게 나쁘시지는 않지유?"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은 다소 엉뚱했습니다.
"나는 괜찮어. 내 아들들이 걱정이지."

"아들들이 왜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줍게 물었습니다.

"나는 자식들이 많어서 이렇게 저렇게 효도를 받구, 자식 여럿 둔 덕을 잘 보구 살지먼, 새롬아배들은 워떡헐 겨. 자식을 고작 하나나 둘만 낳구 사니, 훗날 나 같은 일을 당허면 워떡헐 겨. 난 그게 걱정여."
"그래두 우리 형제들은 자식을 둘씩은 낳었으니 그래두 나은 편이지유. 달랑 하나만 낳구 사는 집들이 쌔구 쌨으니께…. 그리구 요즘은 자식 많다구 다 좋은 게 아니에유. 무자식이 상팔자인 경우도 많으니께유."
"그래두 자식이 많으면, 부모 죽었을 때 와서 푸짐허게 울어는 줄 것 아녀?"
"그게 다 무슨 소융이래유?"
"그래두 그게 아닌 겨."

이쯤에서는 내 쪽에서 양보를 하는 게 옳은 소치일 터였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진정으로 복이 많으신 분이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식들이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지 않은 당신의 자식들을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문득 고맙기도 해서 나는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동생이 재미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동생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큰아이와 내년에나 유아원에 갈 수 있는 작은아이,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큰 녀석인 승목이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지난 7일(어버이날 전날) 저녁에 승목이가 오래 보이지 않아서 동생과 제수씨는 크게 걱정을 했답니다. 여기저기로 전화를 하고…. 9시가 좀 넘어 승목이가 집에 돌아와서 다행이었지만 그들은 화가 나서 야단을 쳤다는군요. 그런데 야단을 하면서 보니 승목이가 옷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아서 혹시?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다음날 아침 승목이가 엄마 아빠께 예쁘게 포장을 한 어버이날 선물을 했는데, 양말과 또 뭐였다더라…. 카네이션 꽃은 하나뿐이어서 왜 꽃은 하나냐고 물으니, 꽃 대신에 엄마 양말을 한 컬레 더 사는 게 한결 실리적일 것 같아서 꽃은 하나만 샀노라는 대답과 함께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꽃은 하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는 겁니다.

동생 부부로부터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와 어머니는 많이 웃었지요. 집에 가서 내 아이들과 뒷동 조카 녀석에게 들려 줄 좋은 얘기감을 얻었다는 생각도 하면서….

어제 저녁 무렵 대전성모병원 교수와 통화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를 알아보았더니, 피검사와 X레이 검사, 내시경 검사 결과 등은 이상이 없는데, 초음파 검사로 볼 때 간에 약간의 '물혹'이 생긴 것 같다는군요. 그리고 확실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CT촬영을 해야 한다는군요.

급한 일은 아니라니까, 어머니의 한 달 분 약이 다 떨어지는 이 달 말쯤 내가 다시 병원에 가서 교수와 만나 의논을 하고 CT촬영 예약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일단 돌아왔다가 다시 CT촬영을 위해 또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행을 해야겠지요.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집안에 얌전히 붙박여 살더라도) 세월은 또 계절들을 안고 업고 겅중겅중 가겠지요. 유수 같고 화살 같은 세월 속에서 인생은 찰나임을 잘 느끼면서도, 팔순이 다 되신 어머니께서 좀더 오래 사시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은, 이미 '허무'와 동무하고 있는 나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이미 내 세월에는 가속이 붙어 있기에….

덧붙이는 글 | 오늘(25일) 오후 7시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 필리핀에 갔다가 28일 오후에 돌아옵니다. 필리핀을 다녀오게 된 사정을 돌아오는 대로 재미있게 기록해 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오늘(25일) 오후 7시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 필리핀에 갔다가 28일 오후에 돌아옵니다. 필리핀을 다녀오게 된 사정을 돌아오는 대로 재미있게 기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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