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허 이태준의 흔적을 찾아서

성북동에서 만나는 특별한 즐거움 ② 수연산방

등록 2002.05.31 10:39수정 2002.05.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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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에서 멋진 전시회를 본 다음이라면 그림에서 받은 감동을 조용히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1946년 월북한 이태준의 옛집을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마무리.

성북동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고, 저만치 서울의 성벽이 올려다보이는 곳에 이태준이 짓고 살았던 집이 있다. 도포 입고 갓을 쓴 목수들이 손수 만든 연장으로, 기일을 정하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지은 한옥이라 그런지 기품이 있는 동시에 사람을 아늑하게 품어주는 맛을 지녔다. 이태준이 1930년에 지어 월북하는 그날까지 아내와 더불어 살았던 곳이 바로 이 곳이며, 또한 수필집 '무서록'을 쓴 곳이기도 하다.


'근원수필'을 쓴 김용준 선생이 살았던 곳도 성북동이고, 수화 김환기가 그의 아내와 더불어 살았던 곳도 이곳 성북동이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김용준 선생과 이태준은 서로 너나들이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하니, 그들이 이 곳 성북동에 모여 산 것도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이태준이 그 집에 살고 있을 때부터 그의 집을 드나들던 지인들은 그가 떠난 집에서나마 벗을 추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빚어준 솔송주 맛에 취해, 이태준은 떠나고 없는 그의 집에라도 오고 싶었던 그들의 부탁은 결국 그 집을 '수연산방'이란 공간으로 거듭나게 했다. 전통한옥에 전통찻집으로는 이곳이 1호라 한다.

솔방울을 달여서 직접 만든 송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따스한 차향에 빠져 이태준의 '무서록'을 읽는다. 이태준이 글을 쓰고, 벗들을 만났음직한 곳에 앉아 책을 읽노라니 책에서도 솔향이 솔솔 나는 듯하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살았던 집에서 그의 체취를 느끼며 그가 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썩 기분이 좋다. 처음 집을 만들 때부터 정원에 심은 갖가지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옛 우물 자리는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 뚜껑을 뒤집어쓰고 마당 한 켠을 채우고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이태준의 흉상이 입구를 바라보도록 놓여 오가는 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책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이 이곳을 더욱 낯설지 않게 만들어준다. 그가 집을 짓는 목수들과 수작하는 이야기, 너무 이른 저녁에는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성벽이 있는 산을 한참이나 헤맸다는 이야기며, 이를 닦을 때마다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그의 집에서 읽으니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이태준이 쓴 '무서록'은 해금된 1993년에야 겨우 초판본이 나왔고, 그의 다른 책 '문장강화' 역시 그 무렵에야 빛을 보게 됐다. 내가 가진 것은 99년 2월에 나온 2판본인데, 한 손에 들어오는 범우사 문고답게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풍경 하나 처마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산에서 마당에서 방에서 벌레 소리들이 비처럼 온다" 노래한 그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책을 썼을 그의 사랑방에서 차를 마시며, 성북동이 일찍이 개발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나무들은 아직 묵묵히 서 있다. 봄은 아직 몇 천 리 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 아래 가까이 설 때마다 나는 진작부터 봄을 느낀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잡아보면 그 도통도통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만 내려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볕만 쪼여주면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 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 (무서록 106쪽 중)

그가 급하게 봄을 맞느라 몸이 달았던 그 마당에서 한참이나 그의 흉상을 마주보고 서 있어 본다. 북에서 외로이 죽어갈 때, 이 아늑한 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솔잎 하나 띄워서 내어주는 향긋한 송차 한 잔 마시며 저만치 서울의 성벽을 바라보노라면 누구라도 이곳 '수연산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 내려서 간송미술관을 지나 성북2동사무소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동사무소 바로 옆에 찻집이 있다.

덧붙이는 글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 내려서 간송미술관을 지나 성북2동사무소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동사무소 바로 옆에 찻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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