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본격 재즈 음반이 가능한가?

젊은 국내 재즈인의 데뷔작 : 나윤선과 곽윤찬

등록 2002.06.01 00:51수정 2002.06.0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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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선 'Reflet'

90년대의 재즈 거품이 월드 뮤직 거품으로 대체된 지금도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재즈 음반 한 장 찾아보기 힘들고, 제대로 된 재즈 음반이 '팔리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존 콜트레인의 'Blue Train'은 큰 레코드 가게에 갖춰놓지 않은 반면 10장짜리 컴필레이션은 가요와 팝을 아우른 전체 차트에서도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국내에도 재즈 음악을 시도한 가수들이 있지 않으냐, 라고 누군가가 물을지도 모르지만 '즉흥성'이라는 기본적인 재즈의 특성에 비춰본다면 가요 음반에 양념처럼 삽입된 재즈풍 가요들을 '재즈'라고 분류하기는 이래저래 민망한 일이다. (강태환이나 박성연 같은 노장들은 어째 '컬트'가 되어 버린 것 같고) 더욱이 국내 대중의 재즈를 듣는 취향은 이상하게 특정 스타일에 편중되어 있어서, 이소라 식의 감미로운 사랑노래 내지는 김현철이 구사하는 T-Square식 퓨전 재즈가 아니고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나름대로 대중적인 재즈를 구사한다던 서영은 차도 1집 앨범이 신통치 않자 2집에서는 가요쪽으로 무게 중심을 두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윤선의 데뷔작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CIM(프랑스 재즈 학교)에서 동양인 최초로 교수 재직, 샹송대회 수상,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주연 등의 화려한 경력을 지닌 나윤선은 이 음반에서 재즈풍의 가요를 동원한 일반 대중에의 파급효과 등은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하다. 수록곡 중 'Ballad for Friends' 정도가 그나마 본류 재즈에서 벗어난 트랙일 뿐, 탁월한 스캣과 애드리브를 선사하는 'The Jody Grind'의 멋진 스윙감, 'The Moon In A Harsh Mistress'에서 들려주는 성숙하고 정제된 창법, 김광민의 'Rainy Day'에서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아름다운 선율을 이끌어내는 역량, 그녀의 음악적 깊이를 보여주는 자작곡 'Reflet'의 신비로움 등 '가요스럽지 않은 재즈 음반'으로서의 모든 면모를 다 갖추고 있는 앨범이다.

뮤지컬과 오랜 경험으로 탄탄히 단련된 나윤선의 음색은 미성이지만 단순히 나긋나긋하고 고운 목소리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만큼 다채로운 보컬색과 표현력을 지녔다. 가령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와 'Ballad for Friends'처럼 대조적인 두 트랙을 살펴보면 나윤선 보컬의 넓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실감할 수 있다.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에서는 사이드맨들의 힘있는 연주와 나윤선의 경쾌한 표정이 절로 연상되는 임프로바이제이션이 어우러지며 들썩이는 스윙감을 자아내지만, 반대로 'Ballad for Friends'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착 가라앉은 채 떨리는 감성을 억제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거기에 더해 수준급의 백밴드와 스트링의 연주도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역할을 한다. 곡 하나하나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완성도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물론 차분한 곡에서 경쾌한 스윙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는 다양성이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 음반이 갖는 의미는 그런 사소한 옥의 티 정도를 상쇄하고도 남는 '부피'가 있다. 가요와의 교접 없이 만들어낸 '거의 최초의 여성 재즈 보컬' 음반이라는 점, 본토 재즈 음반과 비교해도 전혀 처짐이 없는 탁월한 완성도 같은 부분들은 음반을 그냥 듣고 잊어 버리기에는 아쉽게 만든다.

우리가 언제 메인스트림에서 이처럼 '전적인' 재즈 음반을 만나본 적이 있었던가? 10장짜리 재즈 음반을 듣지도 않고 장식용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대중들을 겨냥한 천민 자본주의적 재즈 마케팅이 판치는 가운데, 나윤선의 데뷔작은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해 따스하고 아름다운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는 듯 하다.

곽윤찬 'Sunny Days'

한국에서 재즈 음반을 내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 경우일 것이며 김종필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대중들은 10장짜리 재즈 컴필레이션을 별 생각 없이 구매하면서도 허비 행콕이나 팻츠 월러의 레코딩을 제 돈 주고 구입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김현철이나 이소라, 김동률이 부르는 달콤한 재즈풍 가요는 기분좋게 듣지만 강태환이나 신관웅 선생 같은 인물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에서는 존 콜트레인보다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마일즈 데이비스보다는 빌 에반스가, 빌 에반스보다는 스탄 게츠가, 스탄 겟츠보다는 로라 피지가 더 잘 '팔리고' 더 '유명'하다.

(물론, 이 모두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는 케니 G이지만) 이런 상황은 달콤한 여성 보컬이나 색소폰 연주를 제외한 다른 스타일의 재즈를 공멸하게 만든다. 제작자들은 조성모 타입의 귀공자가 앨범 중간중간에 재즈풍 가요를 섞어놓고 음악성을 과장하는 것을 원하지, 늙다리 연주인의 진지하고 심각하며 까다로운 연주가 담긴 음반을 제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대로 재즈를 하겠다는 인재들은 변절(?)해서 가요와 교접하거나, 대중가수들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하거나, 소수 클럽에서 공연하고 인디펜던트 레이블에서 그야말로 조야하게 음반을 제작하는 길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곽윤찬의 데뷔음반은 그런 모든 사정을 종합해 봤을 때 실로 놀라운 개가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도 남는다. 이 음반의 첫 번째 놀라운 점은 여성 보컬 음악도, 색소폰 연주곡도, 그렇다고 카시오페아나 디멘션 풍의 퓨전재즈곡도 아닌 피아노 트리오 구성의 단촐한 사운드를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또한 두 번째 놀라운 점은 대중 취향에 부합하는 보컬곡이나 뉴에이지 선율 하나 없는, 전 곡이 온전히 재즈의 모양새를 갖춘 음반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음반이 제작되어 시장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황폐한 국내 재즈계에 희망의 불씨를 던졌다는 평을 받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음악의 퀄리티이다. 심벌을 잘 이용하는 일류 드러머인 제프 해밀턴과 정확한 싱코페이션 운지로 이름높은 존 클레이튼을 맞이해 완성한 사운드는 빌 에반스의 흔적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첫 트랙인 'Stella By Starlight'만으로도 충분히 확인 가능한데, 힘있고 절도있게 리드하는 곽윤찬의 피아노와 어우러지는 베이스-드럼의 인터플레이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너무 익숙한 스탠다드여서 오히려 걱정스러운 'Autumn Leaves'에서도 곽윤찬은 전혀 쫄거나(?) 이전 커버 버전을 의식하지 않는다. 원곡보다 유연하고 리듬감있는 구성, 그리고 화성학 교수답게 원곡에 펼쳐져 있는 음을 최대한 활용하는 '꽉 찬' 느낌의 연주가 더없이 유니크하게 들린다.

'Fish and Cake'에서는 앞의 곡들의 정력적 플레이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흡사 교회음악 연주를 듣는 듯,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표현해낸 곽윤찬의 자작곡이다. 기타 연주와 함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Sunny Days'를 앞의 피아노 트리오 곡들 뒤에 배치한 것은 프로듀싱의 승리라고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또한 톰 조빔의 'How Insensitive'에서는 기타를 십분 활용, 원곡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Bop 계열의 색다른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My Funny Valentine'을 원곡의 'Blue' 이미지와 달리 경건한 분위기로 해석한 것 역시도 흥미롭다.

곽윤찬의 데뷔작은 단순히 국내에서 피아노 트리오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존 클레이튼과 제프 해밀턴 같은 '초특급' 연주인과 팀을 이뤄 능수능란히 곡을 리드해가는 모습은 일종의 민족주의에서 오는 '희열'마저 가져다 주고, 스탠다드는 스탠다드대로 색다르게, 자작곡은 자작곡대로 밀도있게 꾸려나가는 수준높은 앨범 구성과 수록곡들의 면모는 가히 '세계적'인 재즈 음반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음반 자체로는 문제삼을 부분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최근 나윤선과 더불어 곽윤찬이 일궈낸 작은 승리와 쾌거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재즈 컴필레이션이 재즈 차트를 지배하는 현실과, 듣기 좋은 곡만을 편애하는 대중의 취향이 과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되어 나갈 것인가. 중견 재즈 음악인과 수준급 연주인들이 '본격적으로' 재즈를 '파고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비관적인 상황을 이런 희망적인 앨범평 말미에 또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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