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이긴 날, 경희대에서 새벽 지하철까지

등록 2002.06.19 10:42수정 2002.06.1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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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다. 큰 싸움은 큰 나라와 해봐야 실력이 는다고 하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는 모양이다. 한국축구는 16강을 지나 당당히 8강이 되었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붉은 옷을 입고 필승을 기원하는 글자가 새겨진 두건을 두르고 형광봉까지 들게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IMF 대란 이후 저하될대로 저하되어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어깨를 잡아 끌어주는 힘이 바로 월드컵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다던 친구도 탈탈 털어버리고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응원에 나선다고 했다. 심기일전하여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한다고.

경희대는 6시가 채 되지 않아서부터 붉은 옷으로 가득 했다. 온몸에 승리를 기원하는 문구와 태극모양을 그려 넣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극일색의 모자와 옷들이 출렁거렸다. 자연히 붉은 색으로 치장하지 못한 사람들과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응원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주점과 식당을 향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근처 호프집으로 갔다. 중형 TV 3대가 놓여 있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을 보아야할지 난감할 정도로 가슴이 떨리다"며 화장실에 많이 갔다 왔다.

경기는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게 했고, 의자에 앉아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의 일어나 있었고, 선수들은 그것을 알기나 했는 지 연장전까지 치러 8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어느 까페에선 음악을 틀어 지나는 응원객들의 못다푼 신명과 한을 돋구었다. 밤새 계속되어도 인파는 줄어들지 않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저절로 발길이 옮겨질 정도였다. 50여분 동안 지하철을 기다리는데도 곳곳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팔이 빠졌다는데 그 말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잠을 잊고 엄마 품에 안겨 박수를 치는 몇 개월밖에 안된 듯한 태극두건의 아가를 보며 함께 즐거워하는 우리들. 이 힘들을 모아 지금의 우울함을 말끔히 해소할 수는 없는가.

누군가 그랬다. 돌아가는 발길은 무겁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야 되므로 어제의 환희는 한 밤의 꿈처럼 몽롱한 것이고, 기쁨도 그저 대리만족일뿐 내 것이 아니라고. 원천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장난말처럼 들리는 소리도 있다.
" 나 우리나라 걱정 때문에 잠이 다 안 온다. 어떻게 될라고 이런지. 월드컵 응원은 딱딱 손발 맞게 잘하면서 왜 선거는 그렇게 안 했는데. "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한다.
" 월드컵 하고 선거 하고 같나. "
새벽 2시가 다 되어 대문을 들어서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흠뻑 젖은 땀냄새를 잊어버렸다.
'월드컵은 월드컵이고, 내 일은 내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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