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휴일 오후, 유월의 신록보다도 열 배는 더 싱그러워 보이는 다섯 명의 여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지혜, 정은, 명화, 현영, 민혜라는 제각기 예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저를 보자 불쑥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일종의 소개장인 셈입니다. 봉해지지 않은 편지 속에는 향내나는 봄나물 같은 한 장의 희망이 들어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직접 찾아 뵙지 않고 이렇게 불쑥 편지만 드리게 된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순천 매산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국어교사 김선경입니다. 학생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시를 배우지만 교과서에서 시를 분석적으로 다루다 보니 시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는 따분하고 어려운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현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글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학생들의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키고 학생들에게 시의 맛을 느끼도록 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시를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스로 시에 대한 느낌을 경험해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수업 후에 아이들이, 시집도 다른 장르의 책과 같이 자연스럽게 골라 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에게는 이 편지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로 느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쓰시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같은 교사로서 부끄러움마저 일었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류의 맑은 물에서 놀다온 아이들에게 무슨 영양가 있는 말을 해줄꼬.
"혹시 사진기 가져오지 않았니?"
저는 좀 딴전을 부리고 싶었던 것인데, 아이들이 꺼낸 것은 사진기가 아닌 볼펜과 수첩이었습니다. 드디어 첫 질문이 터졌습니다.
"선생님은 왜 시를 좋아하세요?"
"시가 왜 좋을까? 너희들은 어때? 시를 좋아하지 않니?"
"시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 그럼 이 시는 어떨까?"
저는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펴서 '아내의 속옷'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시 제목이 이래?' 하는 듯한 여고생 특유의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은근슬쩍 제목에 흥미를 갖는 눈치였습니다. 꽃은 졌지만 푸른 이파리가 무성한 벚나무 아래에서의 시 낭송은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속옷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은 아니어도
아내의 속옷은 찢어진 것이 많다
허연 속살이 다 보이도록
너덜너덜 해어지고 구멍이 나 있다
나는 우스개로 그곳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멍을 더 크게 만들어 놓거나
아예 북북 찢어놓기를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필사적으로 내 손을 막는다
그러다가 함께 엎어져 뒹굴기도 하고
웃음을 참느라 배를 움켜쥐기도 하지만
아내는 웃음 끝에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다
몇 번이고 찢어진 속옷을 매만지다가
원망 섞인 눈을 몇 번 던지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이 들곤 한다.
자작시 낭송을 끝낸 뒤 제가 물었습니다.
"시가 어렵니?"
"아니요."
"그럼 시 같지도 않겠네?"
"아니요."
"시의 소재가 좀 특이하긴 하지?'
"예."
질문자는 제가 아니라 자신들이라는 듯, '예', '아니오'로만 대답을 하고는 멀뚱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너희 국어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해주셨지만, 시를 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애. 시도 그렇지만 진리나 행복에 대해서도 그래. 사람들은 너무 먼 곳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애. 난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어. 아내의 찢어진 속옷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날 아이들은 저에게 딱 열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먼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해. 대체로 시는 자기 삶에서 나오는 거니까. 물론 좋은 삶이라고 해서 꼭 모범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죄 짓고 난 다음 날 좋은 시가 나오는 경우도 많으니까. 지금의 삶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해. 괴로워하면서 자기를 수선해가는 과정에서 좋은 시가 나오거든. 너희 국어선생님처럼 말이야."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저는 입시 교육의 틈새를 찾아내어 참교육의 뿌리를 내리고자 하신 김선경 선생님을 다시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 아이들이 괜한 헛걸음을 했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걸음은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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