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위기와 사랑의 '오프사이드'

사랑의 충격에 대하여

등록 2002.06.15 08:57수정 2002.06.1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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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팀이 폴란드와의 일전에서 2대0으로 압승하여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첫 승리를 자축하며 온 국민이 기쁨에 들떠 있는 바로 그 다음 날입니다. 저는 학생부로 넘겨져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K를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 준비하다가 문득 희망처럼 한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오프사이드'란 축구 용어였습니다.

오프사이드(off-side)란 단어를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공격팀 선수가 상대편 진영에서 공보다 앞쪽에 있을 때, 그 선수 앞에 상대팀 선수가 2명 이상 없는 경우를 오프사이드 위치라고 하며, 이때 후방의 자기 편으로부터 패스를 받으면 반칙이 된다.' 오프사이드는 공격수에게는 반칙으로 적용되지만 수비수들에게는 하나의 전술이 되기도 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오프사이드 전법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반항기가 있고 공격적인 아이들을 다룰 때는 같이 맞붙어 공방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짐짓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아이가 주장하는 말의 타당성 여부를 가늠해보고 인정할 것을 인정해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공격목표를 잃게 하는 일종의 힘 빼기 수법이 큰 효과를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사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지라 그런 이성적인 대응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욱이 분명한 잘못이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불손하고 위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아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언성을 높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제자와의 말다툼에 휩싸이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남학생의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거친 몸싸움 같은 것을 치르기도 합니다. 불행하게도 저에게 바로 그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2교시가 끝나고 잠시 볼 일이 있어서 학급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여학생이 눈에 띄어 아는 체를 하려는데 갑자기 한쪽에서 3학년 남학생인 K가 나타나 무슨 영문인지 그 아이에게 화를 버럭내며 듣기 민망한 욕설을 퍼붓고는 가버리는 것입니다.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심한 욕설을 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가 뻔히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던 터라 괘씸한 생각도 들고 해서 K를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돌아설 줄 알았던 K는 두 번 세 번 소리내어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따라가 바로 등 뒤에서 몇 번을 더 불렀지만 성큼 성큼 앞만 보고 걸어가기만 할 뿐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흥분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몇 걸음을 더 급히 달려가 그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거칠게 반항을 하였고 심지어는 팔목을 잡은 저의 손을 비틀기까지 했습니다. 저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이미 학생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한 상태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그의 팔을 잡아끌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너를 지도하려고 부른 건데 지금 네 태도가 뭐냐?"
"이거 놔요. 이거 못 놔!"

그의 반말지거리를 듣는 순간 저는 어쩔 수 없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지만, 그보다는 그의 태도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평소 개인적으로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면 세 차례나 교실에서 만나온 사이인데 저렇게 막나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기도 하고 교사로서 참담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분 동안 교사와 학생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학생과로 가자고 악을 써댔고, 그는 움켜잡은 제 팔을 쥐어틀어 팔에 파란 멍이 들게 했습니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 근처를 한 대 가격하자 그도 저에게 덤빌 듯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와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그 눈길 때문이었는지 고맙게도 한 순간 이성이 찾아와 제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끓고 선생님에게 사과하면 널 용서해주겠다."
그러나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는 자제능력을 상실한 뒤였습니다. 그는 멱살이 풀리자 용수철처럼 튀어 달아날 태세였습니다. 저는 다시 그의 멱살을 잡았고, 동료교사가 합세하여 그를 교무실로 데려가는 동안 그의 난동에 가까운 행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성을 잃고 날 뛰는 제자 앞에서 저는 한 마디로 너무도 무력한 교사였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교육의 위기라는 말을 심감하고 있었고, 사태를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부드러운 말로 그를 타일렀습니다.

"널 지도하려고 그러는 거야. 순순히 따라오면 이런 일이 없잖아."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학교 그만두면 될 거 아니야."

그는 학생부 선생님들의 지도에도 불응하고 거친 반항을 거듭하다가 끝내 학교를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건너서는 안될 강을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 교무실 창 너머로 그가 부모님과 함께 학교에 올라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당장 올라오지 않으면 퇴학처분이 불가피하다는 말을 담임교사가 그의 휴대폰에 음성으로 남긴 뒤의 일이었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제 고민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풀이 많이 죽어 있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크게 뉘우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에게 정확한 전말을 듣지 못한 그의 부모의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이를 지켜본 동료교사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담임교사의 중재로 저는 학부모에게 정중한 사과를 받았고, 드디어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가지 묻자. 선생님이 부르는데 왜 대답을 하지 않았니?"
"절 부르는지 몰랐습니다."
"네 바로 등 뒤에서 세 번 이상을 불렀는데 모를 수가 있어?"
"정말 못 들었습니다."

'정말 못 들었을까?'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가기도 했지만, 객관적인 정황으로 보아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이 다시금 들자 저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함이었지만, 제 속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질문이 던져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성은 돌아왔지만 진실을 보여주지 않은 학생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위협을 주고 자백을 받아낼까 하는 생각을 애써 지우며, 저는 기도를 끝낸 사람처럼 한참만에 침묵을 깨며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경찰서가 아니라 학교야. 학교는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야. 다만 너의 진실이 필요해. 네게 유리한 상황으로 말을 꾸며서 하지 말고 제발 진실을 말해줘. 다시 말하지만 여긴 학교야. 거짓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난 널 이미 용서했어. 너에게 당한 수모는 평생 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야. 잘못을 했지만 뉘우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거야. 그것만이 내겐 중요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예."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저에게 투항을 하였습니다. 그의 달라진 태도가 얼른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마음 한쪽에서 당장이라도 그의 자백을 받아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그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다보면 자칫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어 급한 마음을 접고, 대신 그가 부모나 다름없는 스승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내리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순순한 마음을 내보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를 개인적으로는 용서했지만, 학교에서의 처벌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를 그대로 두면 교권이 서지 않는다는 동료교사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고,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교권을 실추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출근 후, 서둘러서 그를 찾았습니다. 그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저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렇게 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1교시에 선도위원회가 있다. 너도 참석하게 될 거야. 선생님들은 네가 얼마나 뉘우치고 있는지 너의 태도를 보고 판단하실 거야. 아직은 네가 퇴학을 면하기 위해서 일부러 뉘우치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도 계셔. 솔직히 말하면 내게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어. 그래도 널 믿고 싶다."

그날 열린 선도위원회는, 폴란드 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침통한 분위기였습니다. 엉뚱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월드컵 첫승을 기념하여 사면조치를 해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내볼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런 생각이었는지 삼천리로 멀리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학생부장 선생님은 K가 입회한 자리에서 사건의 전말을 위원들에게 보고했고, K에게도 사실 여부에 대한 동의를 구했습니다. K가 "예'"라고 짧게 대답을 하자, 뒤 이어 현재의 심정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말이 어눌한 그는 "선생님은 부모님이나 다름없는데…"하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선도위원회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교권문제를 거론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위원들이 그의 뉘우침을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설령,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해도 처벌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결국 그의 처벌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문제는 형량이었습니다.

그의 퇴학처분을 강하게 주장하는 위원은 몇 되지 않았지만, 퇴학이 아닌 그 아래 단계의 처벌은 너무 가볍지 않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입니다. 교사와 맞붙어 싸우다시피 한 학생을 사회봉사활동 정도로 형량을 낮추면 결국 그의 영웅심만 키워준다는 어느 위원의 말에 대부분 동감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형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지만, 그 치열한 공방 후 소강상태의 틈새를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퇴학처분도 교권을 살리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 다음 단계를 적용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다 보면 위원님들이 염려하신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충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새로운 충격요법을 사용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사랑의 충격입니다. 그를 진실한 사랑으로 대해주면서, 그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그에게 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인지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몸으로 직접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과 협력하여 그 일을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것만이 그 아이를 살리고 여러 선생님들에 지은 죄도 씻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선도위원회는 그렇게 해서 끝이 났습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위원님들이 저를 믿고 K의 형량을 낮추는 데 동의해주신 것입니다. 며칠 뒤 저는 학교 뒷동산에서 K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K의 성격이 불같이 급하긴 해도 인간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급작한 선회가 몹시도 궁금하여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에게 대들 때는 마치 길들이지 않은 야수 같던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순한 양으로 변한 거야?"
말이 어눌한 그는 한참만에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날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제게 그런 말을 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선생님이 제게 당하신 것보다는 저를 더 생각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들으니까 제가 정말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그때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그의 손을 꼬옥 쥐어준 뒤,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에게 그럴 의도가 꼭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분명 제가 쳐놓은 사랑의 오프사이드 함정에 빠져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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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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