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바닥에서 철학하기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

등록 2002.06.25 19:40수정 2002.07.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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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접했던 진중권의 책은 <미학 오딧세이>였다. 그 책을 읽을 때만해도 그가 지금처럼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걸죽한 논객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에 그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틀에 박힌 논문이나 쓰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미안하지만, 그는 아마 별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글쓰기도 제도 학문에 질식당해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었으리라.


따라서 엄숙 과잉의 시대에 차라리 바보-광대가 되고자 한 그의 선택은 현명했다고 본다. 그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철학은 이렇게 놀 수도 있다...철학으로써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을 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이 범상함의 시대에 위대해지려는 자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말 게다...이 평범함의 시대에 숭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희극적인 숭고', 즉 스스로 바보-광대가 되는 것뿐이리라"(333-334쪽)

이 책은 각종 잡지, 신문, 책을 스크랩한 글 쪼가리들에 저자가 코멘트를 달면서 나왔다. 그는 이러한 한 줄 한 줄의 글 쪼가리들에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망탈리테(정신상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가 발견한 지배적인 망탈리테는 곧 정치적 국가주의, 경제적 자유지상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의 등의 세 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하나씩 들춰내면서 철학을 원용하여 마음껏 조소하고 시원스레 반박해 나간다.

예컨대, 발터 벤야민의 "승리하는 적 앞에선 죽은 자도 안전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정치적 네크로 필리아(시체 선호)를 논하고 있다. 즉 80년대부터 90년의 운동 과정에서 양산된 수많은 "열사들"의 죽음을 둘러싼 경찰, 시위대, 보수언론, 유가족간의 싸움과 논쟁이 갖는 문제점을 파헤친다. 이것은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계열화시킬 것이냐의 문제 놓고 벌이는 치열한 정치적 싸움인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사자숭배 문화는 좌우파에게 모두 존재하고 있다. 운동권에서 그것이 과도하게 나타나 한 때 "열사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권력자들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2차대전의 전범을 가리키는 "호국영령"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국가에 충성하도록 국민을 길들이기도 한다. 요컨대 모두 죽은 자를 이용해 산 자를 지배하겠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산 자여, 죽은 자를 기념하라. 그러나 죽은 자의 노예가 되지는 마라.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산 자여, 죽은 자를 심판하라."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주제들 즉, 폭력, 죽음, 자유, 공동체, 처벌, 성, 지식인.. 등을 다룬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성숙한 사회로 진일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그 동안의 왜곡되고 굴절된 부분들을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상식이 약간 별나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소위 책임있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들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아예 수구언론에 빌붙어 주로 그들의 충견 노릇을 해온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처럼 학문과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연결하면서 그 해결을 위해 직접 몸으로 참여하는 "장바닥의 철학"을 하려는 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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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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