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학생을 포기할 권리가 없어"

학교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

등록 2002.06.29 00:37수정 2002.06.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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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시간, 출석을 부르면서 아이들의 눈을 바라봅니다. 학기초만 하더라도 서로 눈을 맞추고 웃음까지 지어 보여야 다음 번호로 넘어갔지만, 요즘은 그런 유난까지는 떨지 않고 눈만 마주치면 그냥 넘어가 줍니다. 그런데 아직도 상당수의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면서 특유의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을 보면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한 번씩 눈을 맞추어 주는 것이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교사로서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더욱이 냉방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콩나물 교실에서의 여름나기란 말 그대로 끔찍한 것이어서, 요즘 같으면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매 시간 아이들의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고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면서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출석을 부를 때면 으레 눈을 감은 채 대답을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밤을 꼬박 세워 가며 인터넷 서핑을 하느라 부족한 잠을 학교에서 해결하는 이른바 '야행성'들입니다. 그러니 잠은커녕, 저와 눈을 맞추고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 보여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고역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입가에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말입니다. 그런 중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합니다.

"선생님, 전 본래 웃을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잘 됐네. 이번 기회에 한 번 웃는 연습을 해봐."
"제발 저는 좀 포기해주십시요."
"교사에게는 학생을 포기할 권리가 없어. 미안해."

손으로 턱을 받치고 교묘하게 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생각나는 오래 전의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 광이었습니다. 자취방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친구 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면 다시 심야 만화방에 들렀다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침 10시까지 잠을 자다가 지각을 하든지, 아니면 학교에 와서 나머지 잠을 보충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해, 저는 이런 제안을 반 아이들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금요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것. 그 시간에 무엇을 하든지 자유이나 고독하게 혼자서 보낼 것.'

나중에 확인해보니 50여명의 아이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저의 제안을 행동에 옮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내면의 어둠이 깊을수록 빛에 대한 갈망은 더 컸던 것입니다. 그날 저는 그에게 아이들 앞에서 소감을 발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좋았어요. 아주. 처음엔 따분하고 지루했지만 10시가 가까워올수록 시간이 아쉽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도 그는 금요일 밤의 약속을 꼬박 꼬박 지켜나갔습니다. 저도 같은 시간에 혼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보거나, 아니면 밤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학교에 와서 서로의 소감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그의 잘못된 생활 습관들이 조금씩 바로 잡혀 갈 즈음, 갑자기 그는 부친상을 당하고 맙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노란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지리산 산동네에 당도해보니 맏상주인 그와 막소주 한 병만이 댕그라니 부친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든지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혼자 시간을 보낸 금요일 밤의 그의 모습을 애써 떠올리려 하였습니다.

빈소에 그를 남겨 두고 산동네 마을을 내려오면서 저의 발걸음이 차츰 가벼워진 것도 순전히 그 덕이었습니다. 그 후 며칠 뒤 그의 생일이 돌아왔습니다. 졸지에 당한 그의 부친상으로 아직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저는 한 편을 시를 써서 선물로 전해주었습니다.

어른이 되기 전에

네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지리산 기슭, 중동 골짜기에는
노오란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

차를 세 번 갈아 타고
한을 안고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젊은 원혼들이 숨쉬는
지리산 준봉들이 코앞에 서 있는
하늘 맞닿은 동리

너는 그곳에서
작은 체구를 덮는 어색한 상복을 입고
휑한 눈으로 나를 맞이했었지

이제 산 너머에 계신 너의 아버지
홀로 남으신 너의 엄마

아, 이제부터는 내 몫이구나
아직은 작은 체구의 소년이여!

30분만 더 일찍 일어나렴
하루에 세 번씩 창공을 바라보렴
단 한 번이라도
매달려 신음하는 밤을 가져 보렴

어른이 되기 전에
어른이 되기 전에…


학교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이 늘어가는 것은 참 우울한 일입니다. 황금 같은 젊음의 시간들이 바로 학교에서 보내지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치열한 학문의 장이면서,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는 생활의 장이기도 합니다. 생활은 즐거움이 있어야 활력이 넘칩니다.

학교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을 무조건 나무라기보다는 학교가 쾌적하고 즐거운 곳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거창한 이론보다는 한 사람의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학교 밖보다 학교 안에 '나'를 이해해주고, '나'와 눈 맞추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학교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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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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