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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과 함께 한 달 동안 지속되었던 대한민국 초유의 '국민 대축제'는 오늘 저녁 광화문 앞에서의 대규모 행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온 국민을 하나가 되게 했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진정한 애국심의 실체를 벅차게 안겨 주면서 '오∼대한민국'과 '필승 코리아'를 외쳐 부르게 하고 또 눈물짓게 했던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 크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단이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던 그 감격과 기쁨과 열광, 그리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그 맛좋은 질감들을 우리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온 국민의 한결같은 감사와 찬사의 꽃다발 속에 파묻혀 있는 히딩크 감독에 관한 것이다. 또 그것은 그의 '한계'로까지 인식되는 선수 기용 문제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마지막 경기인 대 터키전을 보면서 참으로 아쉬운 마음 한량없었다. 애초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히딩크 감독의 협소한 선수 기용이 끝까지 그대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전까지는 히딩크 감독의 과감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 기용을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연이어 연장전까지 치른 대 이탈리아 전과 스페인 전으로 거의 소진된 체력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과의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컸지만, '준결승'이라는 경기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히딩크 감독의 주전 선수들에 대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독일에 패하고 터키를 상대로 3·4위전을 치르게 된 상황에서 나는 히딩크 감독의 폭넓은 선수 기용을 기대했다. 세계가 놀란 '4강' 위업은 주전 선수들로 이미 달성을 했으니, 3위는 그 동안 벤치를 지켰던 선수들의 대폭 기용으로 달성을 시도한다면 참으로 멋진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력이 거의 바닥난 주전들보다 체력을 계속 충전해 놓고 있는 벤치 선수들을 대폭 활용하는 쪽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거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것이었을까.
나는 히딩크 감독이 3위 자리에 너무 집착하지 않기를 바랬다. 네덜란드 팀 감독으로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에 패하여 3위 자리를 놓친 한을 이번에 반드시 풀 각오라는 언론 보도들을 접하며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터키와의 3·4위 결정전에는 벤치 선수들을 대폭 기용할 계획이라는 또 다른 보도들을 접할 때는 정말 큰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벤치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고 터키 전에서 패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히딩크 감독의 그런 태도를 비난하기는커녕 더 큰 박수로 화답하리라는 생각도 나는 했다(그것은 우리 팀의 패배로 끝난 경기 후에 보여 준 우리 관중과 국민들의 태도로 볼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것이었다).
3위 자리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으로 벤치 선수들을 대폭 기용한다면 참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고 후반전에서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어이없는 전반전의 3실점에 대해서 김태영과 최진철의 결장을 결부시킬 뿐 그날의 전체적인 문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체력의 저하로 헤매고 있는 것이 거의 분명한 박지성을 계속 뛰게 하는 것에서 히딩크 감독의 과도한 편애를 읽을 수 있었다. 박지성을 윤정환으로 교체하기를 바란 것은 끝내 헛된 꿈이었다.
경기 종료 10분 정도를 남겨두고 설기현이 최태욱으로 교체되었지만, 최태욱의 기용은 너무도 늦었다. 히딩크 감독이 왜 최태욱을 그렇게 늦게 내보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몸이 빠르고 기량이 출중한 최태욱은 마지막 경기의 고작 10분을 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태욱은 고작 10분이라도 뛰었고, 최용수는 조별 예선 리그 대 미국 전의 후반전에 '반짝 기용'이라도 되었지만, 한국팀이 일곱 경기를 치르도록 공 한 번 차보지 못한 선수들이 많다.
'꿈의 무대'라는 월드컵 대회가 끝난 지금 그들은 어떤 심정일까. 선수단의 카퍼레이드와 대규모 축하 행사가 벌어지고 갖가지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들이 주전 선수들에게 줄을 잇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무안하고도 허황한 심정과 고독하게 싸우고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청년 시절의 우울한 기억 하나로 옆구리가 결리는 듯한 통증을 겪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나는 초등학교 축구팀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지방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승전 경기 때였다. 후보 선수인 한 아이가 내게 후반전에는 뛰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같은 포지션의 주전 선수 아이가 잘 뛰고 있어서 그 후보 아이의 요구를 묵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후보 아이는 경기장에 온 부모에게 자신의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내게 그런 요청을 한 것이었다. 그때 아차 싶었던 심정은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 하나의 멍에가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그 아이의 간곡했던 표정, 그리고 실망으로 가득 찼던 표정을 떠올리면 너무도 미안하여 마음이 아프다. 주전 아이보다 결코 실력이 뒤지지 않는, 얼마든지 더 잘 뛸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그 요청을 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묵살했던 것일까. 생각할수록 그 순간의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월드컵 4강 위업을 쌓은 일부 주전 선수들에 대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본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가족들을 통해서도 그것은 눈부시게 증명된다. 그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명암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명암을 더욱 확실하게 만드는 스포트라이트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에만 열중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폭넓게 만들 수 없다. 무안함과 공허함을 감내하고 있을지도 모를 벤치 선수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벤치 선수들의 상심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땀과 노고를 똑같이 치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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