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덜 수선된 아이와의 사랑

<시와 아이들> "나도 너처럼 사랑으로 크는 나무거든"

등록 2002.07.10 07:21수정 2002.07.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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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요즘 들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철도공사에 비유할 만합니다. 끝이 없고, 아득하고, 쉼이 없는 노동이 모두 닮은꼴입니다. 어떤 초능력을 이용하여 한 번에 뚝딱하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기차를 세상으로 비유한다면, 그 아래 깔린 아직 덜 수선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저 위태위태하기만 합니다.

작년 일입니다. 설을 세고 돌아와 보니 교실 한 구석이 휑합니다. 이제 며칠 후면 아이들과도 작별을 고해야하는 터라 전달사항 없이 아이들과 눈이나 맞추고 싶던 마음이 싹 가시고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이제 방황도 끝이겠지 싶던 아이들이 5명이나 결석을 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 아이들입니다. 삶의 어떤 과정에서 이리도 뒤틀렸을까 싶은 아이들.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는 우격다짐보다는 사랑의 인내가 필요한 아이들.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덤비면 저도 그만 아득해지는 것입니다.

진이는 그 중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철도공사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입니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가 겪는 병리현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고통도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 정작 제 아픔은 오죽했으랴 싶기도 합니다.

결석과 지각을 밥 먹듯이하다가 오랜만에 학교에 나오면 양호실에 가서 누워있든지, 선머슴처럼 덜렁대고 교실을 헤집고 다니면서 수업분위기를 흐려놓든지 그 둘 중의 하나인 이 아이를 순순히 껴안고만 있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만 정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습니다.

"선생님, 저 진이에요. 처음으로 편지 써요…. 죄송해요. 이제는 메일도 많이 보낼께요. 그리고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선생님 요즘 진이가 고민이 많아요. 엄마 아빠 때문에도 그렇고. 옛날엔 엄마 아빠 행복하게 사는 집이 정말 부러웠는데, 지금은 정말 소원이 있다면 선생님 같은 아빠 하나만 있었음 좋겠어요.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무튼 이제는 엄마 아빠 때문에 절대 울지도 속상해하지도 않을 거에요.

선생님, 벌서 5월이에요. 선생님 처음 본 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요. 그래서 선생님이랑 헤어지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그리고 엄마는 전학 보낸다고 하는데요 절대로 안 가요. 그럼 그만 줄일게요. 항상 건강 챙기세요. 선생님, 사랑해요."


가끔 아이들로부터 쪽지 상담을 하다보면 담임인 제가 소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이 부모님과 유대가 깊고 강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더 많이는 다행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진이의 경우는 그 반대의 심리가 작용했습니다. 아무튼 스승의 날에 받은 이 뜻하지 않은 편지는 진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해주었지만, 그 후의 변함없는 행적은 오히려 저를 더 지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결석생이 많았습니다. 학교 전체 결석수의 절반을 웃도는 숫자였습니다. 이런 경우, 결석하지 않은 착한 아이들을 데리고 오히려 화풀이를 하기가 쉬운 법인데 저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입니다.

그날도 저는 교실에 남은 아이들이 얼마나 저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지, 그 이야기만을 오랫동안 해주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있기에 힘든 아이들을 마음 놓고 지도할 수 있다고. 사실은 몇 아이 때문에 정작 제게 힘이 되어주는 너희들에게 너무 못해주어 미안하다고.


제가 무척 화가 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끝내는 하나둘씩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도 한참을 같이 울었습니다. 그런 중에 결석한 몇 아이의 개인 사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개인 면담을 통해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붙여온 것들을 구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어서 적당한 선에서 말을 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좋은 점들도 강조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말이 친구들을 통해 그 아이들에게 전해진 모양입니다. 가을 수업 때 진이가 쓴 편지에는 그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 말을 듣고 고마웠다고. 그때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 후부터 진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수업시간에 제 스스로 공책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평소 같으면 손에 볼펜을 쥐어주고 한참을 서서 지켜봐야 마지못해 몇 줄이라도 쓰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마음을 잡은 것을 제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습니다. 한동안은 지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에 출석을 부르면 "예"하고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는 대답을 하고는 그것도 모자라 "선생님 진이 왔어요"하고 특유의 코믹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언제 그런 순간들이 있었을까 싶게 진이는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전화도 통화정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진이 엄마도 진이를 포기한 눈치였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후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빚을 내 식당을 차려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처지라 진이를 돌볼 여력이 없는 듯도 했습니다.

그런 진이 엄마에게 저는 자주 전화를 걸어 진이의 순정 어린 마음과 꾸밈없는 천진함에 대하여 말해주며 진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독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분간은 잔소리를 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과 신뢰의 눈빛으로 일관하여 진이를 대해보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이 진이에게 맞는 처방임을 저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이 엄마는 저의 말을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마음에 깊이 새기는 듯했습니다.

그런 중에 하루는 진이 엄마가 쓰러졌습니다. 지병으로 빈혈이 있던 터에 과로가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진이에게 이틀 동안 엄마를 간호하며 집에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모녀간의 정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그 못지 않게 진이로 하여금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사랑을 주는 입장으로 환경을 바꾸어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 학교에 나온 진이의 눈빛은 한껏 달라져 있었습니다. 행동도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학생과에서 벌을 서고 있는 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흡연과 머리 염색이 죄명이었습니다. 잠시 후 학생부장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진이 머리를 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는 농으로 진이가 우리 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이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순간 너무도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눈물이 고맙기만 했습니다. 그날 저는 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널 모른 체 하니까 서러웠지? 선생님도 그랬어. 그 동안 넌 날 모른 체 해온 거잖아. 네 마음대로 행동하고 선생님은 아랑곳도 없고. 그때마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몰라. 선생님도 너의 사랑이 필요해. 나도 너처럼 사랑으로 크는 나무거든."

그날 오후였습니다. 반장이 허겁지겁 저를 찾아와 진이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학생과 지도실에서 벌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학생과 소속 젊은 여교사 한 분이 홧김에 진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뛰쳐나간 것은 아니었고 혼자 앉아 벌을 받다가 가버린 것입니다.

저는 진이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도 진이는 버스를 타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도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저는 차분히 진이의 잘못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조금 언성을 높여 지금 학교로 바로 돌아오지 않으면 지도불응으로 처벌 받을 수도 있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진이의 마음을 돌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진이의 반항심만을 부채질한 셈이 되었습니다. 저는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그랬을까?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널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야지."

그런데 뜻밖이었습니다. 진이가 그 말 한 마디에 순한 양이 되어 터벅터벅 학교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말의 효과가 그렇게 클 줄은 정말 저도 몰랐습니다. 진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사랑에 약하고 사랑에 반응할 줄 아는. 진이는 그 사랑의 향내가 나는 쪽으로, 학교로, 지금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철도공사도 끝이 있는 것입니다.


너의 진한 사랑을 위하여

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지
어머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지어주셨다는
세상을 다 주고도 바꾸고 싶지 않은
너무도 소중한 이름!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한 마디에
아직은 천방지축
철이 들지 않은 우리 진이도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다지
온종일 너의 간호 받으시고
다음 날 전화를 걸어오신 너의 어머니
맑게 떨리던 그 음성에는
너에 대한 기쁨이 실려 있었지

진이야
너의 외자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에 어떤 다정함이
늘 느껴지곤 했단다
왜 그랬는지 늘 그랬단다

생일을 축하한다, 아이야
이제 너의 꽃을 피워
어머니께 달아 드리렴!
그리고 네 이름처럼
진한 사랑을 해보렴

누구보다도
누구보다도
너와 사랑을 해보렴
죽고 못사는 진한 사랑을.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오래 전에 <즐거운 학교>에 기고한 글입니다. 진이의 요청으로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친구들의 사연과 함께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 같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오래 전에 <즐거운 학교>에 기고한 글입니다. 진이의 요청으로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친구들의 사연과 함께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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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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