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검은 머리핀에 대한 기억

'파격'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등록 2002.07.15 06:13수정 2002.07.2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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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선생님…."

누가 불러 뒤를 돌아보니 정선입니다. 부른 이유를 눈으로 묻고 있는 저에게 정선이는 대답대신 가만히 제 손을 가져갑니다. 그리고는 제 손바닥 위에 아직은 꽉 쥐고 있는 자신의 주먹을 올려놓더니 한참만에 주먹을 폅니다. 손과 손의 은밀한 교신이 이루어진 뒤에 제 손바닥에는 하얀 사탕 하나가 놓여집니다.

여학생을 담임하다보면 이런 비슷한 일을 종종 당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사뭇 다릅니다. 제 손에 사탕을 몰래 쥐어준 것까지는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는데, 문제는 사탕을 쥐고 있던 아이의 주먹이 제 손바닥 위에서 머문 시간이 길었다는 것입니다. 쥐고 있던 주먹을 펴서 제게 사탕을 넘겨주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마치 무슨 비밀스런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손바닥과 손바닥이 하나가 된 뒤에야 사탕이 제게 넘어온 것입니다.

정선이는 그런 곰살스런 구석이 있는 아이입니다. 한 마디로 붙임성이 있고 아주 상냥한 아이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고분고분한 아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거기에 당차고 책임감도 강해서 한마디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저를 뜻밖의 곤경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습니다.

정선이의 생일은 6월 27일이었습니다. 지난 6월에는 유난히도 생일 든 아이들이 많아 어떤 날은 날밤을 세우기도 하고, 그래도 시가 되지 않아 다음날 지각 소동까지 벌인 일도 있었습니다. 벌써 15년 가까이 생일을 맞이한 아이들의 삶을 시로 그려 생일 선물로 전해주고 있지만, 워낙 손이 무딘 저로서는 그 일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거기에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살아온 날들이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의 삶을 그려내는 일은 생일 축시라는 이름에 걸맞지도 않고, 비밀을 간직해야하는 교사의 직무상의 윤리의식에도 어긋나는 일이어서 생략에 생략을 거듭하다보면 맹탕인 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런 깊은 사연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작은 말썽이라고 부려 모처럼 쓸거리가 생긴 아이들도 그것을 그대로 시로 옮기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선이는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너무도 착하고 모범적이어서 평소에 저와 부딪힐 일이 없으니 시로 쓸 만한 소재거리가 빈약한 것입니다. 어떤 굵직한 사건이나 추억 하나 없이 시의 밑그림을 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런 아이들이 학급의 거지반을 차지합니다. 말없이 학급을 지탱해주고 있는 고마운 아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저는 우스개로 이런 농을 던지기도 합니다.


"너 생일시 써주려면 추억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사고 칠까?"

정선이는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상냥하고 모범적인 아이지만, 그렇다고 남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정선이는 오래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장녀의 입장이다 보니 대학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했습니다. 학업성적도 아주 우수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도 별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정선이는 학기초부터 취업을 희망하여 얼마 전 S반도체 생산직에 취업이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곧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노력과 실력에 걸맞은 취직 자리를 원할 만한데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런 욕심 없는 마음이 조금은 마음에 걸릴 정도입니다.

정선이 생일 전날, 저는 밖에서 손님을 만나고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먼저 욕실에 들어가 목욕재계를 하고 곧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밤 두 시가 넘도록 단 한 줄의 시구를 만들지 못하고 썼다고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생활 태도가 너무도 건실하여 저와 이렇다할 추억거리가 없는 정선이는 한 편의 그림으로 그려지기에는 마땅치 않는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잠깐 눈을 붙히고 다시 새벽이 되어 알람소리에 놀라 잠을 깼습니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인지 선잠에서 깬 저의 혼미한 머리 속에 어떤 아련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검은 머리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정선이는 고 1때부터 머리에 가는 검은 머리핀을 꽂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한 쪽 앞머리에만 여러 개의 가는 실핀을 나란히 꽂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머리에 어떤 장식을 하는 것을 교칙에서는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담임교사에게 지적을 받았을만한데도 모범생 정선이의 금지된 장난은 멈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일종의 '파격'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파격은 '오랜 관례나 관행이나 틀을 깨뜨리는 일'을 말합니다. 정교하고 가지런한 무늬에 한 두어 개의 어긋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을 '파격의 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을 중학교 때 시인이셨던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납니다. 파격이 없는 예술, 파격이 없는 인생, 그리고 파격이 없는 학교는 생명이 없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밀려오자 저는 이쯤해서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선이의 남다른 가정환경과 아름다운 인성, 그리고 범생이도 어쩌지 못할 사춘기 소녀의 '머리핀의 파격'을 그럴 듯하게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출근 1시간 전입니다. 밥은 거르더라도 세수와 면도를 할 시간을 제외하면 불과 30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코팅을 할 시간도 계산에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가 잘 되지 않은 것은 그런 물리적인 조건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정선이의 잠재의식 속에 묻혀 있을지 모를 아버지 이야기나, 혼자의 몸으로 힘든 가계를 꾸려 나가셨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꿈을 접어야 했던 가난의 아픔과 소외의 쓰라림 같은 것, 이런 이야기들이 밑그림으로 깔리는 시가 생일 선물로 적합할까 싶은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아이들에게 생일 시 써주지 말아요. 그러다가 몸 상하겠어요."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느라 시간만 축내고 끝내는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시를 손에 들고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이 집을 나서는 저를 보고 아내가 한 말입니다. 그런 아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리면서 문방구에 들러 코팅을 하면서 다시 시를 읽어보니 시가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정선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말입니다.

저는 코팅이 된 시를 들고 급히 교실에 들어가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선이의 머리에 검은 핀이 꽂아져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머리핀을 꽂고 있었던 것 같기고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결론이 나질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머리에 검은 핀이 꽂아져 있기를 저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제 바람대로 정선이는 머리에 검은 머리핀을 꽂고 있었습니다. 세어보니 무려 8개나 됩니다. 저는 정선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잠시 후 반 아이들의 청아한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뒤이어 제 차례가 되자 저는 손가락으로 정선이의 머리에 꽂혀진 검은 머리핀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시의 제목을 크게 외쳤습니다.

덧붙이는 글 | 너의 머리핀의 기억

나 어릴 적 
이런 생각한 적 있었지 
언젠가 처음 사랑이 나타나면 
그 어여쁜 소녀에게 
머리핀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너 고1 때였을 거야 
영어 보충수업 시간에 보면 
넌 유난히도 
까만 머리핀을 많이 달고 있었어 

난 생각했지 
넌 좀 끼가 많은 아일 거라고 
그런데 겪고 보니 
너만큼 참한 아이도 없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다시 생각했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은 
머리핀을 좋아하는가 보다고 

너를 보면 늘 마음이 즐겁단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을 
늘 곁에 두고 보는 행복감 같은 것
오래 오래 깨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제 곧 헤어질 날이 오는 구나 
그래도 늘 마음으로 만나면 되겠지 
먼 곳에 있어도 내 가슴에 있는 듯
늘 꺼내어 생각하면 되겠지 

너의 머리핀의 기억을.

2002년 6월 2일
사랑하는 정선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 선생님이

덧붙이는 글 너의 머리핀의 기억

나 어릴 적 
이런 생각한 적 있었지 
언젠가 처음 사랑이 나타나면 
그 어여쁜 소녀에게 
머리핀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너 고1 때였을 거야 
영어 보충수업 시간에 보면 
넌 유난히도 
까만 머리핀을 많이 달고 있었어 

난 생각했지 
넌 좀 끼가 많은 아일 거라고 
그런데 겪고 보니 
너만큼 참한 아이도 없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다시 생각했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은 
머리핀을 좋아하는가 보다고 

너를 보면 늘 마음이 즐겁단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을 
늘 곁에 두고 보는 행복감 같은 것
오래 오래 깨지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제 곧 헤어질 날이 오는 구나 
그래도 늘 마음으로 만나면 되겠지 
먼 곳에 있어도 내 가슴에 있는 듯
늘 꺼내어 생각하면 되겠지 

너의 머리핀의 기억을.

2002년 6월 2일
사랑하는 정선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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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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