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여전히 낯선 '레 미제라블'

열정 없는 비장미의 현란함

등록 2002.07.22 13:27수정 2002.07.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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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kintosh
"사회문제에 국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인류의 상처, 그 큰 고통은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무지와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곳, 여자들이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아야 하는 곳, 아이들의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덥힐 책조차 구할 수 없는 곳, 이런 곳이라면 어디든지 <레 미제라블>은 문을 두드리며 말할 것입니다. '문을 여십시오. 내가 그대 곁에 있습니다.'" – (빅토르 위고가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레 미제라블> 서울 공연. 객석을 지키고 있던 나의 마음은 막이 내리고 박수소리가 잦아들기까지 착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연기와 음악? 빈틈없이 완벽했다. 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자면 '브로드웨이'와 '최고'라는 말이 갖는 무게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무대와 조명? 경이로울 만큼 훌륭했다. 별이 빛나는 밤, 다리 위에서 참회하던 자베르 경감이 몸을 던지고, 그의 몸이 서서히 강물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 나는 넋을 잃었다. 이처럼 카메론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판 <레 미제라블>의 등록상표가 된 현란한 회전무대와 조명의 극적인 사용은 뮤지컬이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의 극대치를 보여준다.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공연 내내 내 마음이 심란했던 이유는 텍스트의 문제라기보다는 수용의 문제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나의 고민거리는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객석으로부터 온 것이다. 가장 먼저 나를 괴롭혔던 것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제기, 즉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지금 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Mackintosh
한국인들에게 '장발장'이라는 동화로 알려져 있는 <레 미제라블>은 부조리와 억압, 그리고 가난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제를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표현하면 그 누구도 아무런 부담 없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자. 혁명과 피.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혁명'과 '피'란 단어가 우리를 얼마나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단어를 더해보자. '민중.'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 '과격한' 방식으로 작품의 주제를 표현해 보자. <레 미제라블>은 압제와 빈곤에 피로 맞서 싸운 민중의 혁명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쯤에서 입맛을 다시며 이렇게 반박할 독자들도 있을 수 있겠다.

"뭐,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있겠소? 거기에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소?" 맞는 이야기다. 어디 그뿐인가. <레 미제라블>에는 주인공이 맨손으로 마차를 드는 "액션" - 혹은 차력시범 – 과 사살 당한 시신에서 금니를 뽑는 "엽기" 및 옷 속에서 은수저와 포크, 쟁반 등이 쏟아져 나오는 "마술"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레 미제라블>에 담긴 이야기들을 빠짐 없이 세어보려는 게 아니다.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주제의식을 짚어보고, 이것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앞의 "불편판"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독자들이 있다면 <레 미제라블>의 집필 의도가 "사회문제와 이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위한 것"이라는 위고의 말을 다시 한번 새겨볼 일이다.

이렇게 반문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원작의 경우는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뮤지컬로 각색된 <레 미제라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렇다면 쇤버그, 그리고 부블릴과 함께 빅토르의 원작을 뮤지컬로 각색했던 캐어드(John Caird)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Mackintosh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이 엄청난 기획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낼 유일한 방법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지요. 우리는 당시 프랑스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드러내기로 했습니다. 위고의 분노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지요."

물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관객은 아니다. 자본논리에 충실하게 투자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도가 튼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기획자들이 설마 혁명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캘빈클라인 정장을 입고 객석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매디슨가(街)의 부호들이 혁명을 원하겠는가. 그들이 원한 건 혁명의 스펙터클이지 혁명의 정신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최소한 서구의 관객들에게 <레 미제라블>은 공감과 감동의 토대는 제공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오래 전 이미 시민사회를 일구어낸 프랑스나 영국, 그리고 심지어 미국에게 있어 <레 미제라블>은 시민의 힘으로 사회를 개혁했던 비장한 추억의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4대 뮤지컬'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레 미제라블>이 서구사회에서 갖는 대중성은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국민이 계몽과 통치, 그리고 동원의 대상이었던 우리에게 <레 미제라블>은 여전히 낯선 한 편의 동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탄에 벌집이 되어 최후를 맞는 프랑스 혁명군을 향해 우리가 눈물을 글썽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죽음과 우리들의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뮤지컬이 "감동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가?

한국인들은 샹젤리제 거리에 늘어선 노천카페에서 익숙한 솜씨로 저녁을 주문하면서도 프랑스에 얼마나 자주 파업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대중교통 종사자들이 파업할 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며 파업 때문에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불편하지요. 하지만 그들의 파업에 지지해야만 그들도 내가 파업할 때 지지해 줄 것이 아닙니까?"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90퍼센트의 프랑스인들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는 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하철 파업 때면 출근중인 노동자의 입에서 "노동자 놈들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안개 자욱한 런던의 경치에 황홀해 하고 '펍(pub)'에 앉아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도 영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나는 계급의 갈등을 이해하지 못한다. <빌리 앨리어트>(Billy Elliot)를 가장 감동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는 우리는 왜 발레 이야기 속에 탄광촌 파업 이야기가 나오고 전투경찰들의 잔혹한 진압 장면이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장 발장의 비참한 옥살이에 혀를 차고, 촛대를 훔친 장 발장을 용서하는 신부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붉은 기를 흔들며 바리케이드를 쌓고 그 위에서 정부에 맞서 싸우는 혁명군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장 발장의 옥살이와 촛대 이야기로 충분하다면, 차라리 학예회 연극에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Mackintosh
우리나라에서 보수성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언론이 <레 미제라블>에 쏟아대는 찬사를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의아해 한다. 어떤 신문은 "감동의 눈물" 운운하는 이야기를 넘어 "표를 살 돈이 없으면 훔쳐서라도 보라"는 기획사의 보도자료까지 인용한다. 이처럼 시장의 질서를 무시하는 "반자본적인" 발언이 보수언론에서조차 흘러나오는 판국이니, 우리나라의 혁명은 뮤지컬 하나로 불붙는 모양이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폭도"라고 불렀던 신문이 "혁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말로 <레 미제라블>을 극찬하는 걸 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워한다. 역시 혁명은 이렇게 순식간에 세계관을 바꾸는 모양이다.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의 열정과 윤리적 정신은 제거하고 탐미적 비장미만 읽어내는 고도의 제련술. 우리는 이렇게 내용과 형식을 별개로 이해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레 미제라블>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상품화된 혁명의 비장미가 가장 충실하게 거래되고 있는 곳은 바로 한국이다.

텍스트로 되돌아가서, <레 미제라블>에서 개혁에 대한 인간의 의지 이외에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삶의 무상함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자들의 삶보다 언제나 가볍다.

혁명에 피 한 방울 보태지 않은 민중들은 "그들이 약속한 신세계는 어디 있느냐"고 야속해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시민군의 시체를 뒤져 반지와 금니를 빼앗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을 바쳐 내일을 꿈꾸던 삶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오늘을 위해 내일을 담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피를 흘렸던가.

하지만 결국 <레 미제라블>을 채우고 있는 것은 개혁에 대한 희망과 낙관의 정신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내일"이라는 단어를 통해 제시된다. 일막이 내리기 전 무대를 채우는 "내일이면(One Day More)"은 오늘의 싸움에 지친 사람에게 내일 밝아올 희망의 아침을 약속하는 노래다.

"내일이면 우리는 신께서 천국에 예비한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한 번 더 동이 트고, 한 번 더 해가 지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나면. (Tomorrow we'll discover what our God in Heaven has in store. One more dawn, one more day, one day more.)" 그리고 두 번째 막이 내리기 전 들려오는 "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역시 억압의 앙시레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의지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가.
저것은 결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민중의 의지가 담긴 가락이다.
당신의 심장에서 울리는 고동이 저 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
내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
It is the music of a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When the beating of your heart echoes the beating of the drums
There is a life about to start when tomorrow comes.)

<레 미제라블>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남자들이 무지와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여자들이 빵을 얻기 위해서 몸을 내놓아야 하는" 곳에, 그리고 아이들이 "머리를 깨우고 마음을 덥힐 책을 구하기"는커녕 점심 끼니마저 챙기지 못하는 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판틴의 분노와 마리우스의 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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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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