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없이 기차타고 실크로드 가는 길

<중국 실크로드 여행기 첫 번째> 둔황으로 가는 기차

등록 2002.07.24 13:35수정 2002.07.2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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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드니, 한국에서 걸려온 모 여자선배의 전화다. 후배뻘인 나에게 존대말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그 선배는 다짜고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다음주에 여행갑시다.”
“여행이라. 좋죠. 당장 오세요!”
“오케이. 그럼 일주일뒤에 베이징에서 봅시다!”


a 기차가 잠시 정차하는 사이에 보이는 창밖 주변 풍경.

기차가 잠시 정차하는 사이에 보이는 창밖 주변 풍경. ⓒ 박현숙

이렇게 ‘뜬금없이’ 여행이 계획되었다. 그야말로 아닌밤중에 홍두깨 같은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예전에 그 선배와 한국에서 만났을적에, 소주를 한잔씩 홀짝이며 “우리 언제 한번 행복한 여행을 떠나보자”는 약속을 한적이 있긴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빨리 그 약속을 기억해낼줄은 몰랐다. 베이징에 돌아온 후부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내가 도대체 무슨 ‘정신없는 대답’을 한건지 그제야 감이 온다. 지금 한가하게 여행을 떠날 처지도 아니고 더군다나 ‘자금사정’도 어려운데 여행은 무슨 여행! 그러나, 이미 한 ‘대답’을 다시 물릴 수도 없고, 또 생각해보니 선배의 ‘행복한 여행’에 대한 갈망이 꽤 깊었다는 느낌이 온다. 한밤중에 불쑥 베이징에 전화한 걸로 봐서도, 단순히 술김에 뱉었던 ‘공수표’는 아니었던 듯 하다.

일년삼백육십오일을 거의 일에 미쳐산다는 그 선배는 정말로 ‘행복한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베이징에 불쑥 전화를 하게 된 계기도 실은 술자리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여행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그 선배에게 사람들은 ‘너는 절대로 여행 못갈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는 것. 왜냐면 ‘일 중독자’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그 선배는 ‘나도 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스스로도 확인하고픈 생각에 불쑥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후일담을 털어놓는다. 전화한 바로 다음날, 비행기표를 끊고 모든 일들을 과감하게 중단했단다. 안그러면 또 못 떠날 것 같아서.

그 기이한 실크로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둔황(敦惶)으로 가는 기차안

베이징 서역에서 출발하는 둔황행 기차를 탄건 저녁 8시 20분이었다. 출발직전까지 나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일들로 인해 모두들(일행은 한명이 더 늘어나서 총 세 명) 허둥지둥 기차를 탔던지라 제대로 준비된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여행경로조차도 미처 결정하지 못하고 쫓기듯이 기차에 올라타야 했다. 첫 목적지가 둔황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가 이번 여행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현지에 살고 있는 내가 다 알아서 생각하고 있겠거니 하는 표정들이었지만 기차표를 끊은 것 외에는 나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시 유일한 소망은 빨리 기차를 타고 악몽같은 베이징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컷 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기차안에서 36시간 정도를 보내야 하는데 그 긴긴 시간동안 ‘계획’한다고 해도 별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무대책이 대책이라는 말이 이럴 때 나를 위한 말이구나 하는 자위를 하며,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바로 긴 잠에 빠져 들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맞이하는 첫 ‘행복’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허리가 뻐근해지는게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되었나보다하고 눈을 떠보니 밖은 어느새 환해져 있다. 맨 꼭대기 삼층칸 침대에 타고 있었던지라, 몸을 일으켜 빠꼼히 아래를 내려다 보니 누워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모두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 닭다리를 잡고 뜯는 사람들, 기차안에서 파는 도시락밥을 먹는 사람 등등 모두들 열심히 '먹는중'이다.

“아가씨, 인제 일어났나? 뭔 잠을 그렇게 오래 자? 도대체 몇시간을 잤는지 알기나 하오? 푸하하.”

a 아침에 기차안 방송과 승무원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는 사람들.

아침에 기차안 방송과 승무원의 지도에 따라 체조를 하는 사람들. ⓒ 박현숙

아래 침대칸 할아버지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대뜸 첫마디부터 잠꾸러기 아가씨라고 무안을 준다. 창문에 바짝 붙어서 차창밖 풍경을 보고 있던 나의 일행들도 고개를 들더니 한마디씩 한다. “소원대로 잠 실컷 잤어요? 자면서 배도 안고팠어요? 벌써 12시가 넘었는데…”

그제서야 나는 그 환한 햇살이 아침이 아니라 정오를 넘긴 햇살이라는걸 알았다. 중국 할아버지가 나를 놀릴만도 했다. 그나저나 일행들이 나 때문에 아침부터 쫄쫄 굶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진다. 후다닥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간단히 세면과 양치를 한 후, 우리는 기차안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첫 식사라고 해봐야 고작 컵라면이 전부다. 식당칸에 가서 먹을 생각도 해봤지만, 저녁의 만찬을 위해 아점(아침겸 점심)은 대충 ‘때우기로’ 했다.

중국 기차여행이 처음인 일행 두명은 아직까지는 모든 게 신기하다는 표정들이다. 기차안의 모습들과 기차밖의 풍경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관찰을 한다. 우리 세명중 중국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지라 나는 이번 여행의 가이드이자 그들의 통역이기도 한 셈이다. 아침에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도 아랫칸 중국할아버지가 뭐라고 말을 붙여보려고 한 모양인데, 다들 ‘귀머거리’ 인지라 답답해서 죽는줄 알았다는 것이다.

아점을 먹은후, 조금 정신이 든 나는 그제서야 여행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기차는 이미 베이징을 벗어난지 16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몇시간 뒤에는 실크로드의 첫 관문인 시안(西安)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잠든 사이 기차는 참 부지런히도 달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잠’보다도 더 좋은 시간때우기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한잠을 푹 자고 났더니 베이징에서의 악몽같았던 시간들도 잊혀지고 또 벌써 목적지의 거의 절반까지 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 밤에 다시 잠들기전까지 어떻게 그 긴 시간들을 때워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워낙에 허둥지둥 오다보니, 제대로 짐도 꾸리지 못한지라 읽을만한 책 한권도 챙기질 못했기 때문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중국여행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여권도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어제밤 기차에 오른 직후에야, 여권을 빠뜨렸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권이 없으면 당장 숙박업소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확실한 신분증이 없으면 중국의 정식 숙박업소에서 묵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두 일행이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니 별 일이야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시름 놓기로 했다.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여권사건이 이번 여행길에서 결국 ‘사고’를 칠 줄이야 그때는 어찌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책과 여권은 안 챙겨왔어도, 잊지않고 챙겨온 게 두 가지는 있다. 바로 여행중 식사를 대비해 싸온 밑바찬 몇 가지와 봉지 커피이다. 여행내내 느끼한 중국음식만 먹는다는 게 상당한 고역인지라 매콤한 한국식 밑바찬들을 좀 준비해왔던 것이다. 중국음식이 체질에 안맞는 이유도 있지만, 매운 고춧가루 양념에 혀가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느끼한 중국음식은 며칠 안가 ‘식욕상실’을 유발할 염려가 있는지라 짐싸기 바쁜 와중에도 그것만은 빠뜨리지 않았다. 식욕은 곧 성공하는 여행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커피는 기차안에서 식사후 입가심으로 마시기 위해 준비해 왔다. 몇차례 중국여행을 다니면서 가끔씩 커피를 마시고 싶었던 기억이 있는지라 역시 잊지않고 준비를 해 왔다. 컵라면을 먹은 뒤 일회용 컵에 봉지커피 한잔씩을 타 마시니 다들 행복으로 몽롱한 표정들이다. 역시 준비해오기 잘했다는 생각이다.

기차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들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너나없이 다 차를 마시기 때문이다. 사실 커피보다는 그들이 마시는 차가 장거리 중국기차여행에 서는 훨씬 더 바람직한 음료수이기는 하다. 탁하고 건조한 실내공기로 인해 늘 몸속에 수분을 공급해줘야 하는데 이럴 때 차만큼 좋은 음료수는 없다.

기차안에는 각 자리마다 보온물통이 하나씩 비치되어 있고 뜨거운 물이 공급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수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기차를 탈 때 항상 잼병처럼 생긴 차병들을 꼭 하나씩 휴대하고 다닌다. 비단 기차를 탈 때 뿐만이 아니라 출근을 할때나 학교를 갈 때도 이들은 항상 차병을 가지고 다닌다.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중의 하나이다.

매번 기차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중국인들처럼 차병을 챙겨올 생각을 좀체로 하지 못한다. 습관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자주 화장실 가는게 무서워서라도 그들처럼 하루종일 차를 마실 엄두가 안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차안의 중국사람들은, 어떤 여행기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마치 ‘붕어들’처럼 하루종일 차병을 입에서 놓질 않는다. 차를 마시면서 창밖을 보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거나 또는 할 일없이 주변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혼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쓸모가 많은 차병이다.

‘환경보호’를 가르치는 아마추어 사진가 할아버지

아침부터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던 아랫칸 할아버지는 일행인듯한 다른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식사중 독한 바이지우(白酒)로 반주 한잔을 걸친탓인지 얼굴이 약간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다. 기분도 적당히 좋아보이는 표정이다.

자세히 보니, 그 할아버지는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는 아닌 것 같고 사진을 찍는 분인 듯 하다. 상의위에 사진가들이 걸쳐입는 조끼를 입은 폼새와 묵직한 사진가방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할아버지도 우리 일행중 한명인 모 사진가 친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더니 아침부터 할아버지는 줄곧 그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모양이다.

둘사이를 연결하는 통역을 하면서 할아버지 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분은 사진을 찍는 분이다. 프로는 아니고 아마추어 사진선생님이었다. 고향이 신장 우루무치인데, 얼마전 베이징의 모 단체에서 주는 공헌상을 받고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가는 길이다.

a 중국 기차시설은 갈수록 '개혁'되고 있는 중이다.

중국 기차시설은 갈수록 '개혁'되고 있는 중이다. ⓒ 박현숙

할아버지는 퇴직한 전직 초등학교 선생님이며, 젊었을 때부터 사진을 취미로 찍으셨다고 한다. 퇴임 이후에는 그 초등학교에 사진반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 초등학교 사진반에서 찍는 사진의 주요 소재들이 ‘환경’에 관한 것이란다.

할아버지 말씀인즉,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환경보호의 중요성도 일깨워 주고 싶었다는 것. 말로만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직접 사진기를 들고 아이들과 함께 오염된 자연환경을 찍다보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그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아이들이 솔선수범해서 주변 마을 청소를 하고 주위 자연환경 보호활동을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덧붙이는 말은, 사진은 단순히 이름다운 것을 찍는 것보다는,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뭔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 옆에 앉아 있는 우리 일행중의 젊은 사진가에 들려주는 이야기인 듯 하다. 그 친구 역시 동의하는 표정으로 열심히 할아버지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다.

말씀을 잠시 멈춘 할아버지는 창밖으로 눈을 돌리더니 우리에게 보라는 듯이 가르킨다. “쯔으. 저것 봐. 사람들이 기차안에서 쓰레기들을 마구 함부로 던지니까 기차길 주변이 저렇게 쓰레기산이 되는거야. 저걸 장차 어떻게 하려고.”

기차길옆 쓰레기 ‘절경’

그 할아버지의 탄식대로 중국의 기차길옆 길이란 길은 이미 쓰레기로 뒤덮인지 오래다. 중국 기차안에서 볼 수 있는 풍경중의 하나는 차병말고도 바로 이 쓰레기 던지는 버릇이다. 하루종일 차를 마시는 것 외에, 기차안 중국사람들은 또한 쉴새 없이 뭔가를 먹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족족 그 쓰레기들을 바로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창가쪽에 설치된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도 열심히 먹고 열심히 버리는 중이었다. 그는 계란을 까먹고 있었다. 옆에는 그의 딸로 보이는 귀엽게 생긴 어린 여자애가 서서 같이 계란을 먹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는 계란껍질을 까는 족족 죄다 창문밖으로 ‘휙’하고 내던진다. 다먹은 뒤 입을 닦은 휴지조각도 ‘휙’, 다 마신 물병도 ‘휙’이다.

여담이지만, 잠시 중국인들의 이 ‘못된’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중국에서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지나치는 기차길 옆 나무란 나무들이 거의 다 비닐봉지나 휴지 등 쓰레기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밭이나 논, 길가에도 기차안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로 흉칙한 몰골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비경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을 지나칠 때도 이 쓰레기들이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중앙방송(CCTV)공익광고에서도 이런 광고를 제작했을까.

달리는 기차안. 한 사람이 자신의 쓰레기봉투를 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휴지통을 찾기 위해서이다.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이 있어서 쓰레기 봉투를 내밀며, 어디에 버려야 하느냐는 표정을 짓자, 그 친절한 승무원은 ‘씨익’ 웃으며 그 봉투를 받아든다. 다음 장면. 그 승무원은 갑자기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열더니 ‘휘익’하고 창밖으로 쓰레기 봉투를 버린다. 얼이 빠진 승객의 표정.

또 얼마전 우연히 본 중국의 TV속에 나온 어린 초등학생의 말이다. 길거리에 함부로 휴지를 버리는 그 아이에게 기자가 다가가 왜 바로 앞에 있는 휴지통에 버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 아이 한다는 말. “청소부들이 다 청소하쟎아요. 거리에 휴지가 없으면 그 사람들은 샤강(下崗, 정리해고)될 거 아녜요.” 놀라운 사회의식(?)이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공중질서의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수학공식이 하나 있다. “5+2=0”라는 것. 무슨뜻인고 하니,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5일동안 내내 ‘질서를 지켜라’, ‘휴지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라고 가르치지만, 주말 이틀동안 집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다 돌아오면 다시 제로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즉 가정에서의 기초질서에 대한 의식 교육이 ‘꽝’이고 부모들이 ‘솔선수범’해서 기초질서를 위반하다보니 학교에서의 교육은 ‘말짱 도루묵’이 돼 버린다는 재미있는 비유법이다.

기차길옆 쓰레기 ‘절경’을 보니, 남 일 같지 않게 걱정이 된다. 저렇게 계속 버리다가는 나중에 치우는 비용은 둘째치고라도, 아름다운 기차길옆 풍경들이 통째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환경사랑’을 강조하는 그 할아버지 심정은 또 오죽했을까.

‘밤’을 달리는 기차

한나절 내내 그 아마추어 사진가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차는 이미 한참전에 시안을 지나 란저우(蘭州)로 접근하는 중이다. 란저우역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모두 창문 가까이로 몰려나와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란저우를 통과하는 황허(黃河)강 물줄기를 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란저우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가 갑자기 정차를 한다. 철로수리를 하려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있는건지 몇 분을 계속 철길위에 멈춰서 있다.

기차가 임시정차를 하는 동안, 승무원들이 부지런히 실내청소를 한다. 바닥을 쓸고 닦고, 보온물통을 새로 가는 등 ‘환경미화’에 여념이 없다. 평균 두 시간에 한번은 이렇게 청소를 하는 것 같다. 80년대에 중국을 기차로 여행했던 폴써로우가 봤더라면 틀림없이 ‘놀라운 변화’라고 감탄했을만한 일이다.

미국인 기행작가 폴써로우의 ‘중국기행’이란 책을 읽어보면 80년대 중국 기차안 풍경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 풍경들 중에는 지금까지 계속 지속되는 ‘현재진행형’들도 있고 놀랍게 변한 ‘개혁형’ 풍경들도 있다. 그중 기차내 시설들이나 청결, 승무원들의 서비스는 폴써로우의 기차여행 시대와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개혁’되었다.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중국기차는 형편없는 ‘돼지우리’에 ‘폭군’같은 승무원들로 묘사되어 있다.

“중국열차는 시설이 형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열차화장실이 돼지우리같이 불결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차장은 폭군일 가능성이 높으며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차는 애쓰며 찾아갈만한 가치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항상 누렸던 최소한의 편의시설은 언제든 차를 타 마실 수 있도록 더운물이 준비돼 있는 통통한 보온통이었다.”

‘통통한 보온통’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더 이상 중국기차를 묘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중국기차 시설은 갈수록 최신식으로 변하고 있고 ‘폭군’같은 차장(승무원)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으며 미친 듯이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차의 음식들은 이제 꽤 먹을만한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선에 따라 아직도 열악한 기차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개혁’되고 있는 중이다.

기차가 다시 출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허 물줄기가 흐르는 좁은 계곡을 지나 란저우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몇분간 잠시 정차할 예정이다. 기차안 사람들은 정차하자마자 서둘러 기차에서 내려, 이미 기차주변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각종 장사치들에게서 저녁에 먹을 식사거리들을 부지런히 사고 있다. 우리들도 서서히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차로 향했다.

요리 몇 개와 맥주 몇 병을 시킨 우리는, 기차안에서 먹는 가장 훌륭한 식사를 했다. 저녁 무렵 기차안에서의 시간은 아침과 오후에 비해 후딱하고 지나간다. 게다가 우리처럼 식당칸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이런저런 잡담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다보면 금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읽을 책이 없거나 좋은 말동무를 사귀지 못한다면 기차안에서의 낮시간이 견디기 힘든 고역임에 반해 밤시간은 훨씬 부드럽게 흘러간다.

저녁만찬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잘 준비를 하고 있다. 아랫칸 할아버지도 어느새 ‘쫄쫄이’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역시 우루무치에 산다는, 영어 잘하는 일층의 엘리트 아줌마도 우아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폴써로우를 언급하자면, 그의 기차여행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또 하나의 풍경은 ‘통통한 보온통’ 외에도 바로 이 ‘파자마 파티’이다.

잠자리에 들기전뿐만아니라, 멀쩡한 대낮에도 속옷차림으로 앉아있는 경우가 많다(침대칸 기차에 해당하는 얘기다). 써로우도 말했듯이 이 ‘파자마파티’는 기차안에서 행해지는 중국인들의 ‘범국민적인 습관’이다. 처음에는 민망하고 어색하게 생각하는 외국인들도 중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이러한 기차내 ‘범국민적인 습관’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일단 기차를 타는 순간, 중국 사람들은 기차실내를 거대한 임시 ‘집’으로 간주하는 듯 하다. 뭘 하든지 그다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장실 가기 귀찮아서 물도 제대로 못마시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집에서처럼 하루종일 차를 홀짝이고 편안한 쫄쫄이 잠옷차림으로 카드놀이를 즐기며 그 민망한 옷을 입은 채 실내 여기저기를 활보하고 다닌다.

쓰레기 버리는 습관에 비한다면 이 ‘파자마 파티’는 꽤 실용적인 습관이다. 불편하게 가는 것 보다는 ‘집’에서 지내는 것처럼 편안하게 기차여행을 하는 게 나쁠 게 뭐 있겠는가. 단지 재미있는 것이라면, 따로 잠옷을 갈아입을 필요없이 그저 바지 하나만 벗으면 바로 잠옷이 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처음보는 나의 일행들은 시종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만 불편한 겉옷을 그대로 입은 채 각자의 침대로 들어가 또다시 긴 잠을 잘 준비를 한다. 이 밤만 지나고 나면 내일 아침에는 바로 둔황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실크로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밤 기차안에서 자는 잠은 그래서 항상 행복하다.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아주 멀리, 때로는 목적지에 거의 근접하게 달려와 있기 때문이다. 기차는 ‘밤’을 달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중국 실크로드 여행은 지난 4월 중순부터 5월초까지 다녀왔던 여행입니다. 그동안 이래저래 게으름을 피다보니 이제서야 김빠진 '여행기'를 올리게 됩니다. 여행은 둔황을 거쳐 투르판-카스-우루무치로 이어졌습니다. 여행 당시만큼 생생한 정감들과 기억들은 이미 많이 퇴색되었지만, 잊어버리기 전에 하나씩 그 기억들을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중국 실크로드 여행은 지난 4월 중순부터 5월초까지 다녀왔던 여행입니다. 그동안 이래저래 게으름을 피다보니 이제서야 김빠진 '여행기'를 올리게 됩니다. 여행은 둔황을 거쳐 투르판-카스-우루무치로 이어졌습니다. 여행 당시만큼 생생한 정감들과 기억들은 이미 많이 퇴색되었지만, 잊어버리기 전에 하나씩 그 기억들을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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