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진입로이종원
이번 휴가는 조용히 사색하는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구상했다. 아내에게도 그런 내 취지를 설명했더니 선뜻 홀로 여행하는 것을 허락한다. "감사, 감사. 오늘 설거지 내가 해줄게."
그러나 다음날 무엇이 불안한지 6살난 딸 정수를 데려가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인질(?)이 된 정수와의 4박5일간의 꿈같은 대화와 답사 그리고 소중한 체험들. 나와 정수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감히 확신한다.
사실 정수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마지막 날 집에 간다고 했더니
"아빠 하루만 더 있으면 안될까?"라고 말했을까.
고답스런 답사만을 고집하지 않고 해수욕장, 갯벌체험, 공룡발자국 탐사, 생태박물관 견학 등 아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일정에 넣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수첩에 부지런히 옮겨 적고, 글을 모르는 정수는 본 것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서울 도착할 때 정수가 차에서 의기양양하게 들고 나온 것은 바로 정수가 그린 스케치북이다. 유물만큼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방법은 달라도 부녀는 똑같이 느낌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꾸준히 질문하고 답변하는 자상한 아빠의 역할도 해보았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 땅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정을 통해 아름다운 산하, 바다 그리고 유물들을 통해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았으며, 그것을 바라본 관조자의 입장에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이 땅을 지탱하고 있는 남도의 풋풋한 인심들, 질퍽한 남해의 절해고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풍성한 마음 씀씀이에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모놀과 정수' 와 '나의문화유산답사' 회원들의 과분한 환대까지 겯들여 하루하루가 즐거운 여정이 되었다. 그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드리고, '인터넷도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의 장이 될 수 있구나..'라는 흐뭇한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한다.
무리한 일정이지만 서울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이 남해 바다다. 직장인으로서 어렵게 시간을 쪼갠 여정이었기에 다양한 이 땅의 모습을 체험하고자 일정을 무리하게 짰다. 점심은 거의 굶거나 차에서 해결하고 긴 이동은 밤을 주로 이용했다. 하루 밤 신세지는 놈이 맨날 10시가 넘어서 문을 두드렸으니 이 자리를 통해 사죄드린다.
결국은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거제도에서는 일정을 포기하고 지심도 배에 올라타 쉬어가는 일정을 잡았고, 마지막 해인사에서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그늘 밑에서 실컷 잠을 자야만 했었다. 힘든 만큼 보람도 느꼈고, 다닌 만큼 감동도 느낀 여정이었다.
여행 일정
-1일차(서울- 무위사-강진차밭-월남사지-도갑사- 우향리 공룡화석-땅끝-푸른모텔)
-2일차(땅끝전망대-갈두항-조개잡이 관광체험장-미황사-김남주 시인생가-강진 청자 도요지-푸조나무-마량 까막섬-고흥 외나로도-순천)
-3일차(여수 향일암-진남관-흥국사-고성 상족암-공룡해수욕장-옥천사-배둔)
-4일차(당항포-장승포항-지심도-거제대학-창원)
-5일차(주남저수지-함안 무기연당-창령 관룡사-용선대-술정리탑-하병수가옥-가야고분군-합천 해인사-저녁예불-서울)
주행거리 - 1999㎞ / 가져간 참고도서 - 11권 / 찍은 사진 - 280컷
출발
7시 30분 곤히 자고 있는 정수를 차에 태우고 비를 맞으며 집을 벗어났다. 이제 4박5일간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는데도 1시간이 더 걸렸다. 서해고속도로에 접어서야 휴가에 나서는 기분이 든다. 보령쯤 지나서야 정수가 일어난다.
"아빠. 우리 어디가?"
"어디 가기는? 멋진 곳에 가지."
목포를 지나 강진쪽으로 빠진다. 여러 번 남도에 왔지만 매번 월출산을 지나칠 때는 한밤중이거나 날이 흐려 그 장쾌한 기암능선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보고 말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운무에 가려진 산은 쉽게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무위사 박석길
남도의 첫 일정을 무위사를 잡은 이유는 '無爲'가 주는 내면적 의미에 마음껏 사무쳐 보고 싶기때문이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위나 조작을 버려라.' 비틀즈의 'let it be' 마음껏 불러보자.
가장 먼저 탐승객을 맞아 주는 것이 바로 '月出山 無爲寺' 의 현판이 걸린 사천왕문이다. 살포시 보이는 여인내의 곡선미랄까? 아스라이 보이는 극락보전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천왕문을 넘어서면 바로 박석길이 나오고 자연석을 이어댄 계단이 나온다. 부처님께 향하는 길은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자연속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인위적 길의 극치인 수덕사 대웅전 길과의 차이점이 바로 이 자연미 넘치는 박석길이다.
극락보전 (국보 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