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용정 명동교회 바로 옆에 있는 윤동주 생가로 중국정부로부터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박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요, 가장 좋아하는 시 역시 윤동주의 작품으로 '서시'라고 한다. 얼마 전, 한 TV에서는 일본의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윤동주의 시를 학생들이 열심히 배우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윤동주를 죽게 한 그네들조차도 그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다.
이태 전 나는 항일유적지 답사단 일원으로 독립운동 요람지 용정 일대를 답사한 후, 용정 시가를 벗어나 30여 분 비포장 도로를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 마을에 이르렀다. 동네 들머리에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바위덩어리가 세워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낡은 초가집들이 듬성듬성한 20여 호의 자그마한 마을로 윤동주가 살았던 1920년대 그 무렵과 별반 다름이 없을 듯했다. 명동 마을 언저리를 둘러보니 시심이 저절로 우러나올 만큼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로써 퍽 아늑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다.'고 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었기에 그처럼 위대한 시인이 탄생했나 보다.
윤동주의 생가는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100여 미터 내려가자 명동교회와 나란히 붙은 첫 집이었다. 생가로 가자면 교회 마당을 거쳐야 했다. 교회로 들어서자 두 젊은이가 불쑥 나타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모두 조선족이었다. 한 젊은이는 비치파라솔을 펴놓고 그곳 특산물인 삼베, 약재 따위를 좌판에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좌판의 상품을 설핏 훑고는 교회 한 쪽에 서 있는 비석으로 눈길을 돌리자, 다른 한 젊은이가 얼른 앞장서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 비석은 명동교회를 세웠던 목사요, 독립운동가이며, 명동소학교 교장이었던 김약연 선생 송덕비였다. 유감스럽게도 비석 머리 부분은 떨어져나갔다.
비석 바로 뒤편에는 100여 년을 더 묵었을 고목이 싱그러운 빛을 잃지 않은 채, 우람하게 서 있었다. 지난날 윤동주가 방학 중 고향에 돌아올 때면 이 나무에 걸어둔 교회 종을 손수 울렸다고 했다. 교회는 단층 한옥으로 벽은 회칠을 한 기와지붕이었다.
교회당 옆 마당에는 암탉 수탉들이 어울려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닭들은 낯선 나그네에 대한 경계도 전혀 없었다. 지난 날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어 이국에서 본 정경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윤동주 생가는 명동교회와 널빤지로 이은 야트막한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명동교회 마당에서 널빤지 쪽문을 밀고 윤동주 생가로 들어갔다. 아담한 단층 기와집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은 듯, 방마다 문은 닫혔고 인기척도 없었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이 적막감만 불러일으켰다.
청년은 처마 모서리에 있는 방명록과 성금함으로 안내했다. 이 성금은 생가 유지비와 명동촌 마을 기금으로 쓴다고 했다. 쪽문과 생가 본체 사이에는 우물이 있었다.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이라고 했다. 나는 두레박을 들고 우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물은 10미터 정도로 꽤 깊었다. 이 날도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낯선 사나이"가 우물 속에 비쳤다.
윤동주의 생가를 떠나 모교 명동소학교를 둘러본 후, 다음은 그분이 영원히 잠든 곳을 찾았다. 다행히 우리를 안내하는 조선족 기사는 지난해 윤동주 무덤을 가본 적이 있다고 장담하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명동소학교에서 다시 용정으로 방향을 되돌렸다. 기사는 몇 차례 차를 세워가며 주민에게 물은 끝에 용정현 뒷동산 중앙교회 묘역을 찾았다. 산은 야트막했다. 날씨가 쾌청하기에 승용차로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만일 비라도 조금 내렸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진흙길로 며칠 전 비 오는 날 차바퀴가 빠진 자취가 또렷했다.
"선생님, 오늘 참 재수 좋은 날이에요."
기사는 묘소를 쉬이 찾은 것은 날씨와 자기 때문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출발 전, 그 날 승용차 삯과 봉사료로 모두 500원으로 주기로 한 바, 봉오동 전적지를 찾으면 100원, 윤동주 묘지를 오르면 100원을 덤으로 주기로 했기에 그가 나보다 더 기뻐했다. 아무튼 그 기사를 잘 만났다. 답사 중, 안내원이 길을 몰라 헤매면 길바닥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