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 만날 수 없는

<벗에게 띄우는 편지 ②> 특별한 여행 길잡이책 몇 권

등록 2002.07.30 10:35수정 2002.07.3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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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어.
"니는 휴가가 언제부터고?"
좀처럼 휴대 전화로 연락을 해오는 일이 없어서 깜짝 놀랐지. 8월 둘째 주부터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라믄 안 되겠네"하시네. 휴가 맞춰서 서울 사는 막내딸 보러 오실 작정이셨던 거야. "느그 엄마하고 함 가 볼라 캤디마는. 그라마 집에는 언제 오노?"

산으로 바다로 놀러다닐 작정만 하고 있었지 집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거든, 사실. 순간, 모든 계획을 접고 엄마 옆에 가서 맛난 거나 얻어먹다가 올까 하는 생각도 했단다. 그러면 너도 잠깐 볼 수 있을 테고. 방학 때마다 시골 외갓집 가서 새까맣게 그을려 돌아오던 어린 날의 추억도 떠오르고 말이야.


너는 연수 받는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시달리는 모양이더라. 방학인데도 고생이지 뭐야, 선생님들은. 방학을 방학답게 잘 보내고, 충전을 확실히 해야 새 학기엔 힘을 낼 텐데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다들 힘들어 보여. 방학이 오히려 더 괴롭기도 할 거 같아.

나? 맘 먹고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쉽게 나지 않는 처지라 가만히 방바닥에만 붙어 보내기도 아깝잖아. 그래서, 멋진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책들을 꺼내볼 참이야. 조용하게, 북적대지 않는 곳에서, 번잡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책들이거든.

'꾼' 그리고 '장이'

a 충남 서천에 있는 독살 / <꾼> 중에서 독살 안에 고기가 들어오면 그물로 건져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다

충남 서천에 있는 독살 / <꾼> 중에서 독살 안에 고기가 들어오면 그물로 건져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실천문학

2001년에 나온 이 두 권의 책은 글을 쓰는 이용한과 사진을 찍는 심병우가 같이 작업을 한 거야. 이제는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광들, 더 이상은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풍광들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어쩌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책이야. 두 사람이 간 길을 되짚어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책이지.

'발품을 팔아서 우리네 토종 생활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꾼'은 심메마니, 약초꾼, 해녀, 송이꾼 같이 자연에 깊이 뿌리내린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야. '솜씨를 내서 우리네 전통적인 서민생활을 이어온 이들의 삶과 멋'을 모아 놓은 '장이'는 명주장이, 대장장이, 짚풀장이, 베장이 같은 이들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지. '꾼'에는 자연을 가공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삶에 주워담는 이들을, '장이'에는 자연물을 인간 세상에 요런조런 모양새로 가공해서 쓸 수 있게 해 주는 이들을 만날 수 있어.

a 접부채 외길 53년 이기동 씨 / <장이> 중에서

접부채 외길 53년 이기동 씨 / <장이> 중에서 ⓒ 실천문학사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리워해야 한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 '그리운 병'에 들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삶을 한번쯤 보듬고, 껴안고 싶었다. 사실 거창한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에는 친절한 안내문도 많고, 책도 많고,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무형의 이 생활풍속은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많다.(4쪽, 머릿말에서)"


두 권 모두, 책에 일러 둔 사람들을 직접 가서 만나볼 수 있도록 연락처며 찾아가는 길을 일러 놓았어. 언젠가, 너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을 몇 군데 골라 책갈피를 꾹 접어 놓았단다. 언제라도 니가 오면 같이 펴 볼 수 있게 말이야.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그리고 <생태기행 3>

여행갈 때는 자가용을 가지고 가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그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또 그보다는 한 번쯤 걸어서 다녀보는 것이 그 곳을 훨씬 더 풍성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고들 해.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해도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고민스럽지.

너도 운전을 하니까 걸어서 하는 여행은 별로 경험이 없을 거야, 그지?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하던 걸, 산악문화에서 펴낸 이 책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에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이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나는 '길이 멀어 가기가 힘들어 뵈는 곳을 제외하고, 나도 걸어봄직하다 생각된 몇 곳만 골라 보자.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꼭 한 번 그 길을 걸어보며 내 몸으로 이 땅의 기운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 하나 품고'라고 적어 놓았네.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굴목이재 옛길, 월암사지 누릿재 옛길, 강원도 뱅뱅이재 옛길, 동강의 칠족령 옛길까지. 굳이 둘러가지 않아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버린 곳들을 일부러 불편하게 힘들게 걷는 맛은 참 남다른 기쁨일 거 같아.

a 울진 십이령의 옛길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중에서

울진 십이령의 옛길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중에서 ⓒ 산악문화

멀리 갈 형편이 안 된다면 수도권 일대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김재일 선생의 <생태기행 3권>을 보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어. 걷기에 특별히 멋진 한강 둔치, 북한산 소귀천, 느티나무 드리운 양수리 물가, 불의 산 관악 이야기도 있네. 서울 살기 시작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가 본 곳보다는 낯선 곳이 훨씬 더 많아.

서울에도, 수도권에도 생태적으로 건강한 공간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도 달라 보이더라. 중부권을 소개한 책이나 남부권을 소개한 1권이나 2권보다 나에게 더 피부 가까이 실감나는 것이 3권이었어.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 그리고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a 부안 곰소의 소금꾼 이몽룡 - <꾼> 중에서 무자위(수차)를 돌리며 소금을 거두는 일은 곰소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

부안 곰소의 소금꾼 이몽룡 - <꾼> 중에서 무자위(수차)를 돌리며 소금을 거두는 일은 곰소가 아니면 보기 힘들다 ⓒ 웅진닷컴

좀더 말랑말랑하게, 수다 떠는 기분으로 여행을 계획한다면, 혹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생각한다면 이 책이 어떨까 싶어. 역시 이용한의 글에 심병우의 사진을 엮은 책이긴 한데 안홍범의 사진까지 더해져서 시각 자료가 보다 풍성해진 책이 '사라져가는 이 땅의 서정과 풍경'이야.

풀을 엮어 만든 도롱이를 입고 논에 나가는 촌로의 모습, 숨비소리 힘겹지만 고단한 삶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해녀들의 하루하루, 부지깽이 들고 쫓아다니던 시골집 아낙의 정겨운 고함이나 벙거지처럼 눈을 이고 있는 와편굴뚝의 다정함이 살갑게 다가오는 책이란다.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지. 이 책 역시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 곳을 자세하게 안내해주고 있어서, 박물관에서 만나는 박제화된 모습이 아니라 일상에서 살아 숨쉬는 과거를 만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거 같아.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이야기를 엮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는 기자들이 직접 겪었던 과거의 일을 추억하듯 적고 있어서 훨씬 더 쉽게 읽혀. 도꼬리만 한 실타래를 내놓으면 도망갈 길부터 찾았던 일이며, 며칠에 한 번씩 다녀가는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며, 죽음마저도 잔치로 끌어올렸던 상여 이야기까지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걸어 나올 거 같아. 글맛이 살아 있어서 더 그런 모양이야. 발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추억으로 가는 여행에 도움이 되어줄 거야.

이 정도면 휴가 계획 잡는 데 도움이 좀 될 거 같지? 그나저나 가고 싶은 곳이 이렇게나 많아서 막상 짐 꾸릴 날이 돌아오니까 걱정이 커진다. 별 수 없이 또 이런저런 책을 끼고 앉아 열심히 생각 좀 해 봐야겠어.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8 세트 - 전8권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이형식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2016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이정숙 지음,
산악문화, 2001


생태기행 1 - 자연과 사람의 새로운 만남

김재일 지음,
당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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