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 바쁘신가요?

미하엘 엔데 <모모>

등록 2002.08.05 23:30수정 2002.08.1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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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언젠가 선배님 한 분이 내게 "요새 바쁘지?"라고 인사를 건네 온 적 있다. 순간 나는 그런 인사 문법 자체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 일어 "아뇨. 한가해요"라고 답한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 선배는 아무런 악의 없이 그런 수인사를 했지만, 가뜩이나 바쁜 도시생활의 피로를 느끼던 나는 그런 인사가 그다지 곱게 들리지만 않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리들 난리를 피며 바쁜척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말이다.


<느리게 산다는 의미>,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이런 책들이 요즘 시중에서 인기 있는 서적의 반열에 오르는 까닭은 뭘까? 그만큼 현대인들은 각박한 도시의 시간에 정신 없이 내몰리며 사는데 적지 않은 염증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다.

목숨을 내건 광란의 질주를 감행하는 폭주족들도 알고 보면 대책 없이 질주하는 도시문명에 잘 길들여진 아이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답답한 공간을 속도에 힘입어 탈주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그저 미끄러질 뿐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세상에 나온 지 이미 30여 년이나 흐른 동화이다. 아직 못 읽은 사람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은 동화다. 단순히 현실과는 무관한 동화적 차원이 아니라, 시간과 삶에 대한 긴요한 문제제기가 번뜩이는 책이어서 권하고 싶다.

가끔 높은 산에 올라 저 산 아래에서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물결을 내려다 볼 때면, 마치 개미떼 마냥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모모가 만났던 도시의 사람들 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다. 말 그대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지만 정작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모르는 게 대다수 현대인의 초상이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볼 때, 거지 소녀 모모가 폐허가 다 된 원형 경기장 한쪽에 자기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 때 그 원형경기장도 고대 도시인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던 놀이터였겠지. 그러나 그곳은 모모가 찾기 바로 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지고 찾는 이도 드문 곳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인간의 시간은 덧없다.


놀이를 잃어 버렸고, 함께 마음을 주고받을 대화하는 시간을 창백한 회색신사들에게 빼앗겼다. 아니, 시간을 아낀답시고 그 여유공간을 자진해서 악한들에게 갖다 바쳤다. 이른바 "내일"을 위하여 오늘 친구를 만나 대화할 겨를도 없이 일에 쫓겨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책에 따르면 회색신사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이 책에선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시간을 앗아가는 회색신사들도 처음엔 좀처럼 다루기 힘든 존재로 묘사된다. 아이들의 중심에는 하루 종일 남의 고민과 이야기를 들어 주고도 조금도 지치거나 지루해 하지 않는 모모가 있었다. 모모를 만나는 사람은 무슨 골치 아픈 고민이 있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때 동네에서 유행하던 말은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였다. 모모를 만나면 뭔가 자신이 근사한 존재로 변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 안의 지혜로운 말도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창조적이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놀 수 있었으며, 모모의 친구 이야기꾼 기기도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시간 도둑들인 회색신사들이 도시에 쫙 깔리면서부터 상황은 돌변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마저도 어른들의 규제에 의해 목표가 불분명한 단거리 달리기를 강요받았다.

모모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엔 아이들마저도 회색신사들의 농간에 전부 포섭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네 살고 있는 풍경이 딱 그 모양이다. 아이들은 뛰어 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방학도 하릴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 한 권도 읽을 여유가 없이 헉헉대며 학원을 쫓아다니는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모모처럼 시간의 근원지에서 일하는 호라 박사를 만나 사람들의 빼앗긴 시간을 돌려 줄 수 있는 영웅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일이 아니다. 어떤 대상이든 가슴으로 대화하며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단지 그 능력을 묻혀 두고 있어 까마득히 잊어 버렸을 뿐. 이 책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바쁜가?" "무엇을 잃어 버렸는가?"

모모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비룡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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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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